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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량 김창성 Dec 22. 2022

월드컵,놀드컵,즐드컵

축구를 가슴에 품다

#1. 축구! 나답게 소심히 꿈꿨다!


 기억 속에만 남은 1970년대 중반 어느 여름날,

서울 청량리 근처 문리대로 기억한다. 이곳이 정확 지는 않지만 다른 곳으로 이전했는지 새로 건물을 짓기 위함인지는 모르지만 텅 빈 채로 남아있었다. 학교 안 어느 공터에는 하얀 조끼러닝에 반바지만을 입고 또래보다 한참 큰 형들의 축구를 지켜보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축구골대조차도 흔치 않았다. 그 형들은 주위의 큰 돌을 두 개씩 옆으로 놓아 골대를 만들고 5대 5 정도 시합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골대 뒤로 날아오는 공을 주워 주고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그중 한 형이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으니 "애들아! 난 지금 집에 가야 해"라며 말했다. 모두가 아쉬운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지고 있던 형들이 나를 보며 "쟤라도 끼우자"며 나를 보았다. 지고 있던 형들이 시합을 끝내기 싫었는지 내게 다가와 한 형이 "너 골키퍼 할 수 있니라고 물었다" 나는 그때 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린 나이라 선뜻 내 의사를 표시하지 못했지만 어찌 되었든 난 이미 그 들 속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형들은 "넌 아직 어리니까 네 앞으로 오는 공만 손으로 잡아"라며 은근 응원을 해 주었다. 난 그저 공을 차고 뛰어다니는 게 좋을 그런 나이여서 재밌게 그 형들과 축구게임을 즐겼다.

그때는 집에 TV가 있는 집이 드물어 축구 중계를 자주 볼 수도 없었고 그저 동네 형들이나 아저씨들이 축구하는 걸 보는 게 다였었다. 그래도 어린 나이에 축구를 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던 것일까! 연신 내가 지키는 골대로 달려드는 형들의 공을 슬라이딩까지 하며 막아냈다. 우리 팀 형들이 박수도 쳐 주고 잘한다고 칭찬을 하니 어린 마음에 더 신이 나서 더 열심히 했었던 것 같다. 연거푸 그 형들의 공을 서너 번 막아내자 우리 팀이 역전을 하고 말았다. 그 어린 마음에 승리라는 느낌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을 걸 보니 축구의 재미를 제대로 느꼈던 것 같다. 이 승리를 맛보는 순간, 벌써 날은 어둑어둑해 지고 공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흘렸다. 그래도 이들의 축구는 끝나지 않고 철없는 어린 나는 집에 가야 한다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이때, 어디에선가 아이를 찾는 애가 타는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나의 엄마가 나를 찾으며 부르는 간절한 목소리였다. 나의 엄마는 어둠 속에서 내가 입고 나간 하얀 조끼러닝을 본능적으로 알아채시고 내게로 온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전 자주 그때의 이야기를 한다. "아들 잃어버린 줄 아셨다며 아직도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라고 하신다. 나의 기억과 엄마의 기억이 조금은 차이가 날 지언정 축구는 내게 그렇게 꿈이 되고 있었다.


기억 속 축구화

 초등학교 5학년쯤이었다.

동네 아는 형이 축구부에 들어가 선수용 축구화라며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그 축구화를 신고 맨땅에서 뛰고 공을 차니 소리도 너무 멋있고 부러웠었다. 그 축구화 밑창에는 나사 같은 것을 끼워 넣을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조금이라도 딱딱한 바닥을 걸으니 또각또각 소릴 냈다. 그 시절 부러움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이내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엄마, 아버지를 조르기 시작했다. 축구화를 사 달라고 말이다. 이때는 대부분은 축구화를 제대로 신고 축구를 하지 않았다. 그냥 신고 다니는 신발로 공을 찼었다. 어느 날 집에 와 보니 엄마가 시장표 축구화를 사다 놓으셨다. 파란색 세무가죽에 흰 로고가 있는 멋진 축구화였다. 철없는 나는 집안사정을 알리가 없었다. 나는 문득 그 형의 축구화가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바보스럽게도 벽에나 박을 때 쓰는 못을 생고무로 된 뽕에다가 박았다. 이 날 밤은 축구화를 머리맡에 두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 같다. 다음날 나는 이 축구화를 평상시 신는 신발처럼 신고 학교에 같다. 시멘트 바닥길이 나오면 자랑스럽게 걸었다. 마치 그 형이 선수용 축구화를 신고 걷는 모습을 떠 올리며... 제법 소리가 그 축구화가 내는 소리와 비슷하게 났다. "또각또각", 소리를 잘 내주었다. 주위의 친구들이 축구화를 보며 다들 부러워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축구화 참 멋졌다. 모든 운동은 장비발이지 ㅋㅋㅋ... 며칠 거의 이 축구화만을 신고 축구도하고 그냥 평상시 신고 다니기도 하고 했더니 밑창의 뽕이 닳기 시작했다. 하루는 축구 시합을 하는데 발바닥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축구화를 벗고 보니 양말에 피가 제법 많이 묻어 있는 게 아닌가! 뽕이 닳으면서 박아뒀던 못이 발바닥을 뚫고 올라온 것이 아닌가! 신발을 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엄마에게 혼 날 생각을 하니 집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몰래 발바닥에 빨간약으로 소독을 한 후, 뽕에 박은 못을 하나씩 뽑아 버렸다. 이런 게 폼 잡으려다가 죽는다는 게 이런 건가..ㅎㅎ 그래도 아직 뽕이 많이 남아 있어 신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축구를 하고 있는데 소나기가 내렸다. 축구는 멈출 수 없는 법, 축구는 나를 신나게 만든다. 이제 축구화를 세탁할 시간이 되었다. 불이 있는 아궁이에 말렸다. 잘 마르지 않아서 보니 바닥에 박은 못구멍 사이로 물이 발바닥까지 올라오는 것이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나의 축구이야기....

축구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때의 별명이 테크션이었다. 뭐 증거는 없다. 아직도 날 기억하는 친구가 있다면 아마 증언해 줄 것이다.


축구이야기

 2022년 카타르 월드컵도 이제 끝났다. 4년 후를 기약하며...

지금도 스포츠뉴스나 축구 중계를 보면 가슴이 뛴다.

누군가는 축구를 하고 싶어 축구부가 있는 곳으로 전학을 했고 선수가 되어 그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나는 지금 돌이켜보니 그 정도의 열정과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현실을 핑계 대며 내 탓보다는 남 탓만 하며 세상을 대하고 살 있나 보다. 인생은 모든 것이 선택이었다. 내가 하지 못하면 이룰 수 없다.

 바라만 보이도 좋고 생각만 해도 좋은 것이 있다는 것 만으로 행복하다 하겠다. 그때 내가 접었 던 생각과 꿈이었기에 더욱 오래도록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고 믿는다.

나에게 있어서 축구는 월드컵은 아니다.나에게 놀이가 되어 준 놀드컵!

나에게 있어서 축구의 최고 무대는 즐기는 축구 즐드컵!이다. 지금도 마음속으로 심장이 뛰듯 축구를 위해 뛰고있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의 장면으로 남아 줄 나의 축구이야기...

 그때 내기 못했던 용기를 글이라는 것으로 대신하며 더 많은 이야기들, 하프타임이 지나고 있는 지금 후반전에서 다시 이어 가길 바라본다. 곧 후반전 킥오프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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