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연계는 뇌 부위 중에서도 편도체, 해마등의 부위를 일컫는데 과도한 긴장과 불안은 이곳에서부터 야기된다. 나는 확실히 변연계가 고장났다.
나는 초록을 싫어했다. 등산도 싫어하고 계절이 바뀌면 다들 설레서 한 번씩 갔다 온다는 단풍놀이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계절이 바뀔 때는 더운 여름이 가고 시원한 가을이 오는 것만 반가웠고, 추운 겨울이 갈 때는 따뜻해진 까닭에 예쁜 옷을 많이 입고 sns에 잔뜩 사진을 올릴 수 있어서 그 부분만 달가웠다.
지금도 여전히 등산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도 자주 넘어져서 또 넘어질까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싫다. 그리고 집 밖으로 멀리 떨어져서 오래 있는 것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아니 매우 좋아는 한다. 틈만 나면 갈 곳, 가고 싶은 곳 들을 휴대폰에 캡쳐해 둔 사진만도 너무 많아서 언제 정리할지 모르겠는 정도로 관심이 많다. 그리고 늘 계획도 굉장히 열심히 세운다. 동선을 짜고 지도 어플로 그 동선을 몇 번이고 공부한다. 네이게이션 앱으로 모의주행도 꽤 여러 번 해 본다. 오죽하면 잠자리에서 "안내를 시작합니다" 소리를 듣고 반려인은 "또 어딜 가냐고" 물어볼 정도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동선에서 또 평소에 가고 싶었던 다른 곳 어디를 들릴 수 있을지 계획한다. 다시 말하면 한 번의 외출로 큰 효율을 올리기 위해 부던히 생각하고 계획한다. 하지만 그렇게 계획을 다 세워놔도 갑자기 확진자가 매일 삼천명을 웃도는 코로나에 대한 불안이 나를 엄습한다. 제 시간에 집에 올 수 있을지도 너무 걱정된다. 네비게이션에 찍히는 경로의 일정 부분이 붉거나 주황빛이 돌면 일찌감치 포기한다. 유류비, 시간 그리고 교통사고의 리스크를 모두 다 생각하면 새로운 곳은 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다. 판단 과정은 길지만 결과는 늘 같다. 그래서 늘 가는 카페만 가고 늘 먹는 것만 먹는다. 새로운 것을 도전했다가 그것을 도전하느라 소비했던 시간과 돈과 나의 노력이 너무나 아까울 것 같아서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이사를 하면서 내가 그렇게 관심이 없었던 온통 초록의 마운틴 뷰가 우리 집 거실과 안방의 전체를 차지했다. 넋을 놓고 하루종일 초록만 바라봤다. 그리고 깨달았던 건 나는 초록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거다. 단지 집에서 멀거나 내가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빨리 오지 못하게 될까봐 불안해하는 까닭에 그것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조금 서글펐다. 내가 이렇게 여유없이 살고 있었구나. 내가 이렇게 불안을 떠안고 살고 있었구나. 하지만 너무 당연하다. 매일 내가, 지인이, 가족이 잘 살아 돌아올지를 걱정하고 삶의 안위와 안녕을 고민하는데 초록은 무슨 초록, 단풍은 무슨 단풍. 그냥 내가 오늘 살아서 내 방 침대에 대짜로 누워있는 오늘의 상황 조차가 너무 다행인데. 초록은 사치였다.
집 거실 소파에서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시면서 바라보는 초록은 그야말로 너무 예뻤다. 초록은 초록 그 자체로 사람에게 안정감을 준다던데 그 느낌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리고 안방 침대에 누워서 보는 초록색 경관은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집에 돌아오지 않아도, 시간을 꼭 지키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이런 초록에 반해서 최근에는 화분도 키우고 있다. 화분을 들인지 벌써 8개월이 넘어가는데 어떤 화분은 죽었고 어떤 아이들은 아직 건재하다. 그 뒤로 몇 개를 더 들였는데 아직까지는 새로 죽은 아이는 없다. 이토록 불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힘들다.
그래도 여전히 집에서 먼 초록은 그다지 달갑지 않다. 무사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나에게는 아직도 너무나 큰 미션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랬듯이 나도 꽤 뜨거운 사랑을 해서 이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여기까지 왔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불안장애 그 외의 다양한 원인으로 상담센터를 들락날락 했다. 그 때 주로 상담했던 내용은 ‘남편이 죽을까 봐 무서워요’ 였다. 내가 죽음에 이렇게 예민하고 두려워했나 싶을 정도로 정말 매일매일 남편이 죽을까 봐 겁이 났다.
남편이 죽을 병에라도 걸렸나요?
절대 아니요.
아주 아니었다.
남편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보다 7년 전이 훨씬 더 건강했다. 당연하다. 그때는 더 젊었으니까 세포도 젊고 미토콘드리아도 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길가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요소에 대해 항상 막연하게 두려워했다. 급기야 남편이 계속 차를 사고 싶어 하는데도 끝까지 주구장창 반대했었다. 차로 출근하면 30분 정도면 가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갈아타고 계단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면 1시간 반 정도 걸렸던 통근시간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차를 사는 것에 대해서 나는 완강하게 반대했지만 남편은 결국 중고차를 하나 사왔다. 그날은 아주 핏대를 올리며 격하게 다투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운전을 하면 운수사고에 휘말릴 확률이 산술적으로 그냥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괜히 차를 타고 가면 누군가 술이 취해서 우리 차를 들이받을것만 같고, 경로에는 고속도로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내주행보다 아무래도 속도가 빠르니 사고가 나도 심하게 날 것 같았다. 그렇게 계속 상상을 하니 남편이 올 때까지 늘 마음은 전전긍긍하며 오매불망 현관문이 열리기까지 숨죽이며 기다렸다. 남편이 그때는 실제 운전경력도 2-3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혹시라도 내 전화 때문에 운전에 방해될까봐 전화도 못 걸고 문자도 못 보냈다. 그저 숨죽이며 애꿎은 지나간 예능들만 미친 듯이 채널을 돌려가며 기다리는 수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당장 가장 현실적인 위험요소는 도로 위의 사정이었지만 사실 그게 아니었어도 아주 나중에 나 아니면 남편 둘 중 누군가는 먼저 죽을 문제에 대해서 또 미리 걱정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객관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재를 즐기기에 한참 즐거울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신혼이었는데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나는 심리상담센터까지 다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더 슬픈 건 다시 돌아가도 크게 다를바가 없을 것 같다는 거다.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가만히 두면 흙탕물과 길이 아닌 엉뚱하고 험한 곳으로 내 다리는 늘 힘겹게 투쟁하며 걷고 있는데, 아주 가끔 정신이 차려지면 다리를 잘 다독여 좋은 길로 다시 안내하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노력하며 살아간다고나 할까. 내 경로의 기본 설정은 흙탕물이고 잘 포장된 예쁜 도로로 가게 하려면 다른 사람보다 몇 배로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 억울하고 고통스러웠다. 남들에게는 평지가 내게는 언덕이었다.
내 뇌는 어디서부터 잘못 설계된 것일까. 질문에 대한 뚜렷한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억울함은 점점 분노의 씨앗으로 자랐다.
초보운전 1년이 갓 넘었다. 그래도 운전 부분에서는 많이 양호하다(고 위안을 삼고 있다). 무서워서 운전을 못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장롱면허 10년차인데 동네 마트밖에 못 가는 사람, 몇 년째 고속토로는 못 타고 시내주행만 하는 사람, 운전 연수를 열심히 알아보는 사람 등 참 다양하다. 운전을 처음 배우게 된 계기는 정말 절실하게 필요에 의해서 였다. 열이 펄펄 끓는 아기를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웠다. 내가 살던 시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병원은 소아과는커녕 동네 조그만 의원 포함, 단 한 군데도 없었고 무조건 택시를 타야 했다. 10분 안쪽으로 도착하는 소아과가 있었지만 나이 든 의사 선생님은 아기의 증상과 상관없이 늘 똑같은 하얀 항생제만 줬다. 그래서 더 진단을 잘 하는 병원으로 가야 했고 그곳은 차로 15분, 그리고 그 병원의 약이 잘 들지 않을 경우에는 (아기들은 호전속도도, 악화속도도 성인보다 훨씬 빨라서 하룻 밤 사이에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더욱 더 진단을 세밀하게 하는 병원을 찾아가야 아기의 열이 떨어졌다. 그 병원은 자그마치 편도 1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운전을 도저히 안 할 수는 없었다.
중학교때 달리는 차에 치인적이 있다. 본네트에 올라갔다 다시 떨어졌을 때 인간의 몸과 차체가 부딪히는 소리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매우 생생하다. 그렇게 남을 치기 싫어서 운전은 평생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결국 하게 됐고 그 뒤부터 지독한 취미가 생겼다. 급발진 영상부터 사소한 접촉사고 블랙박스 영상을 보면서 공부했다. 어떻게 하면 사고를 피할 수 있을지, 어떤 사고가 많이 나는지, 치사율이 높은 사고는 어떠한지, 그리고 어떤 사고가 가장 자주 일어나는지 등등의 갖은 사교육 영상으로 버무려진 나의 운전생활은 여전히 잘 지속되고 있다. 현실은 피터지고 스펙터클한 내 머리 속 상상보다 훨씬 평온하고 재미 없다. 다시 말하면 훨씬 안전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가끔씩 다른 사람들을 태우면 하나같이 내가 운전을 급하게 한단다. 어느날 반려인이 불안장애 있다고 하는 사람이 운전은 왜 이렇게 격하게 하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나는 불안장애가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이유인 즉슨 어서 빨리 도로를 벗어나 집에 가고 싶어서 교통량이 많지 않다면 규정속도를 살짝 웃돌게 된다. 특히 회전할 때도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면 빨리 교차로에서 도망(?)치기 위해 조금 속도를 내는 경향이 있었다. 아이러니하다. 불안해서 더 위험하게 운전을 한다니. 그리고 위험하게 운전하는 이유조차 불안해서라니. 이쯤되면 불안해서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인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더 불안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미지 출처
1. http://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6522
2. https://jjalbot.com/jjals/Vpp7QZp5Q3
3. https://wooriclass.co.kr/archives/9631#cb
4. 영화 '올드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