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변연계는 심장에도 손을 뻗었다
초등학교 때 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수행평가나 각종 시험에 굉장히 부적합한 인간이라는 것을. 3학년 때였다. 열도 많이 나고 굉장히 아팠다. 거무잡잡한 편이었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그날따라 유난히 희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몸이 아프면 이런 느낌이구나 라는 강력한 느낌을 받은 최초의 기억이기도 하다. 하필이면 학력평가가 겹쳤고 성적이 그래도 잘 나왔던 나는 안타깝지만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시험을 쳤다. 결과는 이제까지 봤던 시험중에 최고 성적이었다. 전 과목에서 단 4개밖에 틀리지 않아서 반 안에서 뿐만 아니라 전교에서 상위권에 속했다. 그때 굉장히 의아했다. 머리도 아프고 힘도 없어서 이번 시험은 무조건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성적이 잘 나왔다니 좋으면서도 당황스러웠다. 그저 단순히 그날따라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었다.
학창시절에 시험 성적이나 수행평가 등 많은 시험 역시 연습했던 것보다 늘 덜 나왔다. 물론 너무 당연하게도 과하게 긴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험을 망하면,
이 시험을 잘 못 보면 어떡하지,
부모님께 혼이 무지 나겠지,
선생님께 엄청 맞겠지,
다른 친구들도 나를 무시하겠지,
부모님께서 나한테 실망했다고 하시겠지,
하면서 끝없이 또 나를 상상속의 실패자의 방구석으로 마구 밀어 넣기 시작했다. 사실 반 친구들은 내 성적에는 관심도 없었을텐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압박감에 어린 학창시절을 보냈을 내가 너무 안쓰럽다.
긴장의 정점은 당연히 수학능력평가였다. 물론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학업 코스를 밟은 사람이면 수능에 대해 누구나 힘든 기억이 있을 것이다. 수능시험에 대해 긴장하지 않는 사람은 아예 대학 진학을 포기했거나 학업에 전혀 꿈이 없고 일찌감치 다른 길을 찾은 사람에 한정되어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나는 시험때마다 젖은 시험지, -그리고 이것은 가끔씩 찢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미끄러지는 펜 역시 편안하게 집중하는 데에 늘 일등 방해공신이었다. 방금 이 구절을 쓰면서 깨달았다. 편안하게 집중하는 것이 가능하단 말이야? 내가 처음으로 편안하게 집중하는 것이 가능했던 건 출산 후 요가를 하면서 명상하던 때였다. 그 전에는 내 마음속은 늘 전쟁중이거나 전쟁 후 폐허가 된 공터, 아니면 전시준비 상황의 셋 중 하나 어딘가에 머물렀다.
많은 불안장애 혹은 불안과 같은 심리적 기재를 가진 사람들이 한 두 개의 강박쯤은 흔히들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시간강박이 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오늘 저녁 잠을 잘 자야 내일 덜 피곤할거라는 생각 때문에 잠자기 두어시간 전 부터는 잠에 잘 빠져들고 중간에 깨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일단 기본적으로 외박을 잘 안 한다. 침구와 베게 그리고 이불이 바뀌면 잠에 들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은 굉장히 좋아한다. 여행을 간다는 건 그 여행 기간에 양질의 수면을 포기하고 놀 거리를 온전히 찾는 것을 선택한 경우다.
아무튼, 나는 잠에 잘 들기 위해 암막커텐으로 꼼꼼하게 빛을 차단시키고 휴대폰을 머리에서 가장 멀리 둔다(전자파가 뇌세포를 파괴해버릴 것 같기 때문) 무음모드는 기본이며, 현관문의 쇠로 된 걸쇠를 잊지 않고 채운다. 얼마 전에 동네 커뮤니티에서 술 취한 어떤 사람이 무방비하게 아파트 문들을 파손하고 돌아다닌단 기사를 봐서일까? 아니, 그 전부터 이렇게 현관문에 굉장히 예민하게 신경 쓴다. 대학원을 다닐 때 현관문을 누가 술이 취해선지 두드리고 문을 열려고 했던 시도가 있었다. 그때도 심장이 조여오고 쿵쿵뛰었다. (누구라도 이랬을 테지만) 경찰에 신고하고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또한 가스벨브도 무조건 잠근다. 요리를 하고 가급적 바로바로 잠그는 편이지만 나는 나를 믿지 못하며, 더더욱 동거인은 못 믿는다. 내가 자는 사이에 가스벨브에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니 자기 전에 꼭 점검한다. 그리고 켜진 가전제품이 없나 확인하고 비로소 잠자리에 든다. 잠을 자면서 더워지거나 추워지지 않는지 창문과 실내온도를 점검하고 특히나 혹한기 같은 경우에는 자다가 눈이 건조해서 깰 수 있으니 가습기는 물론이거니와 머리맡에 촉촉하게 적셔둔 가재수건을 둔다.
아,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아기가 숨을 잘 쉬고 있는지 본다. 아기가 태어나고서는 미니인간의 바이탈체크(?)행위를 절대 잊지 않는다. 아기가 어릴때는 따로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두 세시간만에 저절로 깨서 아기의 코에 손을 대보고 배가 상승-하강 하는지 확인했다. 뭐 아주 당연하게 그때는 수면부족이었고 깨어있는 내내 예민하고 불안했다. 이런 사실은 비단 나 뿐만은 아니고 많은 아기 엄마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잠을 자기 전에만 강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약속 시간에 대한 강박. 왠지 정각에 만나기로 하면 정각에 타인 앞에 나타나야 할 것 만 같다. 11시까지 약속이면 미친 듯이 시간을 맞춰서 준비한다. 그리고 조금 빨리 도착하는 한이 있으면 차 안이나 다른 가게에서 기다렸다가 10:59이쯤되면 나의 긴장도는 최대가 된다. 손, 이마 등에 땀이 나고 심장이 꽤 빨리 뛴다. 드디어 정각이 되었고 나의 발걸음은 문을 연다. 성공이다. 약속이 있을 때마다, 내담자와 만날 때마다 내 심장은 이렇게 쉽게 나댄다. 그때마다
이라고 부탁하지만
부교감신경인 심장이 내 말을 들을리가.
하긴 말을 잘 들어도 아주 큰 문제가 생길테니까
차라리 다행인가.
가장 처음 갔던 심리상담센터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불안이 있는 사람은 100킬로, 110킬로로도 아무 방해 없이 빠르고 쾌적하게 갈 수 있는 도로를
과속방지턱이 곳곳에 놓여있고, 앞 뒤에 방해하는 차량이 많은 도로를 가는 것과 똑같다고.
늘 이런 다양한 방해를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110킬로로 달릴 거 80킬로로 달리니
얼마나 안전하고 좋아.
적어도 사고발생 시 사망률은
더 낮을 거 아니야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잘 이해된다.
늘 그 방해요소에 대해 분석하고 생각하며 싸워야 하기 때문에 쉽게 지치고 힘이 든다.
이미지출처
2. http://www.iptnews.kr/bbs/board.php?bo_table=opinion01&wr_id=685&device=pc
3. https://www.austinspinehealth.com/blog12/fight-or-flight
4. https://www.todaysparent.com/baby/baby-development/is-it-normal-to-check-a-newborns-breath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