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 던져진 모티브와 표현의 정체성, 모방과 창작
시간의 강을 거스르고
물리의 경계를 넘나들며
깊은 사유의 결과물이
강물에 던져놓아 졌는데
이목 없이 번지 찾아 부유하다
목마르던 꾼에게 마침 낚이는
간혹 불상사.
모티브와 표현, 사고와 의식이
형식을 바꾸고 은유를 달리해서
옷을 갈아입고 돌고 돌아다닌다.
인고의 시간을 지나
별을 만나러 나갔는데
낚시에 걸려들어
낯선 자궁 안에서 다시 잉태된다.
유전자의 본질은 변형되고
내가 내가 아닌 듯이, 맞는 듯 아닌 듯이
강물에 다시 던져 놓아진다.
그 본질만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 건지.
많이 보고 읽고 또한 배움의 길이기는 한데,
학습과 모방과 창작이 모호하다.
청연
사안과 만물을 대하는 생각이 천차만별인데,
수작과 아님을 평가하고 작품을 선별하는
기준의 질은 정당한가.
창작 속 글이라는 것이 점수로 매겨지고 말로써 평가되고, 상대적 주관적 개입의 요소가 다분히 존재한다.
상업적 로비와 품앗이에 더하여 작품을 대하는 평가는 그날 누구에게 어떤 상태에 보였냐에 따라서도 수상의 희비가 엇갈린다.
어떤 대작이라도 누군가에겐 감흥 없는 글일 수도 있다. 주관적 가치에 의한 해석에 따라 등급의 매겨짐과 평가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나.
객관적 지표 없는 다양한 색을 지닌 문인들의
각자 사고에서 해석되고 평가되는 것인데.
실체가 없는 무형의 글이 평가되는 것에,
저평가나 평가의 선상에서 제쳐진다고 해서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품앗이 없이 주목받지 못하는 것에도 역량을 의심할 필요도 없다.
적어도 화두가 일어나 본질을 생각하고 사유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 산고의 창작이라면 그 자체가
글의 가치이지 않을까.
작품의 가치와 글과 문학이라는 본질보다,
기교로 만들어지는 미래 독자의 다수를 보고
시장성을 글의 가치로 평가하고, 선택하고 내어놓는 광야에서의 글짓기 놀음.
산고를 통해 쥐어짜는 창작보다
어디서 보고 듣고 베껴낸 지식 더미에
신기술을 도구삼아 포장된 나열의 형체가
번듯하게 시장을 선점한다.
누군가의 귀한 사유물이 광야에 떠다니다,
소재가 목마르고 시스템에 능숙한 숙련자에게
적잖이 영감과 형식을 주어 새롭게 태어나기도 한다.
본 주소가 모호한 창작의 정체성도
광야에 던져진 실체 없는 본질의 숙명.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기교로 먹고살다 갈고닦아진 기술로
반죽과 숙성만 잘 해내도,
흐르는 강물 속에 운 좋게 낙점이 되면
어느 날 주목받는 별이 될 수도 있다.
운 좋은 숙련된 기교의 그것.
깊이 사유하고, 조용히 쓰고 말없이 내어놓는
순수한 성정의 창작자의 뺏김과
비주류 속 진정성의 가치는 어디에.
고뇌하는 창작보다 연결성과 소통, 드러냄의 우선은 본질을 채워가는 수고로움의 질이 떨어지지 않겠는가.
인공의 반죽보다 내적 관찰과 성찰, 사유가 이뤄내는 진정성 있는 창작물이 묻히는 아픔이 없게.
갈수록 사람냄새가 훼손되고, 그 맛이 변질되고 만들어낸 신기술이 문학 창작물 마저 지배한다.
그것이 옳은 것인 양, 그것이 만들어주는 것을 덥석 물어 적당히 기교로 탈바꿈시켜, 내 것인 양 내어놓는 몰염치도 있다.
그런 지식이야 지금은 손가락만 두드리면 그 양이 홍수 속에서 선택만 기다리는 수준이다.
적어도 순수문학과 예술에서는 지양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높은 경쟁률을 뚫고 권위 있는 문학상에 등단하지 않는 이상, 애써 내어놓은 산고물을 드러내려 발품과 손품을 팔고, 스스로 영업을 하는 창작의 현실이 애잔하고 씁쓸하다.
그 권위의 등단도 빛은 잠시, 작가의 길은 그제야 시작이다. 문학계의 지존과 자존 특유의 틀과 감성에 맞게 흘러가는 교류와 음지의 수고도 따라야 그 빛을 지켜낼 수 있다.
혜성처럼 나타나 단 한 번의 주목을 끝으로 기억 속 저편으로 자리를 내어놓기도 한다.
창작 그 자체에만 몰두해도 흙 속의 진주는 드러나고 별이 되는. 별이 되어 보기도 전에 그 숙고와 노동이 기억 속의 저편마저 되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슬픔이 있지 않게.
글과 문학이라는 종이책의 정서 같은 가치를, 공인되지 않은 수묵의 먹빛 여백에서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