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지렁이의 서사

폭염

by 청연

폭염 피해 아침 내 갈 길에

한낮 땡볕 사투의 날것,

아침은 그저 청아하고 맑은데.


가벼운 발걸음 속도 늦추어

지렁이의 마른, 주검 앞에 서다.



땅속 오가며 흙에 숨을 넣고

죽은 나뭇잎에 유기물로

생명의 거름 짓고,

묵묵히 소임 하던

눈먼 지렁이


빛 피해 축축한 땅밑 거처에서

세상 구경은 해지고 밤에나,

추적추적 비 오는 날



땅속마저 타가는 날에

냉기 찾아 숨 돌리는 사람들 틈

불같이 바짝 마른 음지 땅의

목숨 건 몸짓


작열하는 태양 아래가

제 살 곳 아님에

마지막 수분마저 말라버려


비 내린 뒤 열기는

흙 속 물을 차올리고,

숨 쉴 곳에 온 힘내나

뜨거운 회색빛 돌길이

주검으로 맞이한다.


동강 나고, 찢기고, 갈기 부서져

혈흔에 체액마저 아스팔트 길을 적셔

마른 사체는 행인에,

자전거 바퀴에 한 번 더 눌려난다.



주검이 되어서야

오롯이 온기를 받아들여

세상 만물의 생명 햇빛이

지렁이에겐 최고最苦의 선물


음지 생태계의 바로미터

본분을 다하던 수호자

죽고 나서야 햇살의 축복


그게 독이었던 걸,

이제는 하염없이



하늘과 땅이 제 빛을 잃어

소명을 못 누리고

목숨을 다한 뒷날에

햇빛이 그 삶을 비추네.

눈이 시리네, 마음도 시리네


눈이 없어 길 헤매다

남은 물기 영겁에 날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필사적인 몸부림도

그저 마른 그림자 하나



말라 터져가는 땅에서

붉은 햇살에 명命 놓는

어린 눈먼 지렁이


뼈도 없이 말랑한 생명체

아파하는 자연의 처절한 순리

아침 맑은 햇살,

그 뒤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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