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기억
집에 오래된 선풍기가 있다. 그 선풍기가 참 편안함을 준다. 이 기계의 연식을 세어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4년이 지났다. 그전에 본가에 있던 선풍기가 문제가 생겨서 새로 산 선풍기를 드리고 수리한 것을 아직 쓰고 있다. 참 오래되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을 뿐 리모컨과 자연풍, 수면풍 기능은 물론, 색도 디자인도 편안하고 깔끔하다. 그래서 아직까지 장수하는지도 모른다. 사드린 것인데 아버지 병환도 있으셨고 자주 본가를 오가며 소소하게 챙겨드렸다. 색이 바래진 것은 물론 버튼이 뻑뻑하게 눌리는 것도 있고, 흠집도 나고 바람세기도 약하다. 그 선풍기가 침대 옆 전용 선풍기가 되었다.
수년이 지나면서 바람세기가 약해졌다. 하지만 너무 센 바람이 싫은 나에게는 오히려 더 좋다. 특히나 잠을 잘 때 약해서 부드러운 그 바람이 좋다. 아버지 계실 적 향수와 함께.
유독 나는 아날로그가 좋다. 편하고 기능 좋은 최신을 선호하면서도 아날로그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정제된 세련미와 심플하면서 자연질감 그대로거나, 단색 무채색의 아날로그적 감성이 있는 그런 것들이 좋다.
사실 무엇이든 값을 더 주면 만족도면에서도 그렇고, 관리를 잘해서 오래 쓰는 것이 가격면에서도 더 나을 수도 있다. 먹거리부터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럼에도 양질의 담백하고 단순한 그런 것에 대한 성향이 더해진다.
최근에 선풍기를 새로 사게 되었다. 요즘 들어 더 미니멀 아날로그 삶을 지향하던 중에 옛날식 선풍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 집에 있던 그런 선풍기이다. 회전도 선풍기 헤드 쪽 뒤 꼭지를 누르고 들어 올려서 작동한다. 전원, 미풍, 중풍, 강풍 버튼을 딱딱 눌러서 쓰는 단순기능의 원조 선풍기. 그것을 샀다. 여러 상황의 고려와 긴축을 위한 의도도 있었다.
단순함과 흰색의 깨끗함은 좋은데, 상자를 여는 순간 화학품 냄새로 머리가 아프고 무게도 가볍고 약해 보였다. 그러나 흰색 단색의 심플하고 가격 좋은 선풍기가 보이지 않아 그냥 쓰기로 했다. 하루 밖에 두었다가 냄새를 좀 빼고 주방에서 요리할 때나 식사할 때 쓰는 거라 그런대로 적응하고 썼다.
그런데 일 년 만에 그 선풍기가 멈춰버렸다. 일 년도 아니지. 지난여름 쓰고 다시 쓰는 거니까. 날개는 돌아가지 않고 약하게 모터 소리를 내면서 온 집안에 단내를 내며 과열되고 있었다. 하마터면 화재가 날 뻔한 너무 황당한 상황이었고, 얼른 전원을 빼고 열기를 식히게 밖에 두었다.
저렴한 아날로그 감성이 일 년 만에 막을 내린 다시는 사지 말자라는 경험을 남기면서 그 선풍기는 집에서 내보내졌다. 14년이 넘은 선풍기도 저렇게 멀쩡한데 싼 게 비지떡의 정수를 경험했다.
아무튼 투박한 버튼식 아날로그 선풍기는 새로움이었다. 여러모로 단순한 삶을 살려하는 시점에 가격면에서나, 어린 시절의 기분에서도 그랬다.
오래된 선풍기도 아날로그형 선풍기도 이제 무엇이든 편안하고, 단순하고, 기능에 충실한 것이 좋다. 복잡하고 다양한 기능보다. 어차피 그 기능을 다 쓰지도 않아서 비용측면에서도 경제적이다.
일상이든 생각이든 가치관이든 여러 부분에서 변화와 변동을 하는 시점을 지나오면서, 오래된 선풍기는 편안함을 주는 일상 속 식구이다. 날이 더워지면서 먼지를 씻어내고 끼우는데, 플라스틱 가루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보내야 할 때가 되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문득, 기억 속의 집과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할 것 같은 먹먹함이 올라왔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마음 한켠에 아직 있어서이다. 살아생전 아버지와의 추억에 아쉬움이 많아서이다.
아버지 계실 적 우리 집. 햇살 잘 들던 안방에서 아버지는 늘 기록을 하셨다.
항상 등을 굽히고 엎드림 자세로 보고 쓰고 하셨다. 그 모습이 집과 햇살과 안방의 한 그림으로 기억 속에 있다. 두꺼운 옥편을 펼쳐두고 한자와 일기를 쓰시던 아버지의 기억이, 오래된 선풍기의 나직한 바람 소리와 함께 묵은 애틋함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