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소한 기억
<작가 구혜경의 일상에세이> #1
기억에는 별난 구석이 있다.
아주 소중하다 여겼던 기억은 돌아보면 그날의 추상적인 감각만 남긴 채 사라져있고, 어떤 사소한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고 내 안에 오래 머물러 있다.
나는 숨이 무른 계절의 과일 중에선 포도를, 지금처럼 숨이 마른 계절 과일 중에선 귤을 제일 좋아한다. 내가 지금보다 한참 어릴 때 우리집은 이 두 과일을 제철에 맞춰 꼭 박스 단위로 사두곤 했다.
이제 내 곁에 없는 사람. 귤을 박스째 사들고 온 그 사람이 초겨울 어느 날 어린 내게 말했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귤 한 박스를 다 먹어두면 감기에 안 걸려.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기를 앓았다. 매일 손톱 아래가 노랗게 물들고 빈 귤 박스가 쌓여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 말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모여 있는 한 무더기의 귤을 보면 그 말을 떠올린다.
망각, 혹은 간직. 두 가지 길. 매일 새롭게 만나는 순간들, 빠르게 기억이 되는 파편들 앞에 이정표를 세우는 건 내가 아니다. 나에겐 그럴 권한이 없다. 그 사실은 때론 축복 같고 때론 비극 같지만, 기실 현상 자체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내 안에 살아남은 기억 속에서 그때의 어린 내가 놓쳤던 어떤 것을 본다.
얄궂게도, 그렇게 인생을 조금씩 배운다.
ⓒ구혜경, 2022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