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작가들이 섭외하는 소리를 들으며 일을 하다 보면 어김없이 ‘기선제압’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누가 더 노련하게 섭외를 잘하는가?’
‘누가 더 방송될 가능성이 높은 자연인과 통화를 하고 있는가?’
비록 같은 프로그램에 속한 작가들이지만 제작은 네 팀으로 나눠 팀별로 운영되기에 서로의 성과에 곤두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공간에 있다 보면 각자 자기 일을 하고는 있지만 팀원 모두 그 섭외 소리를 듣게 된다. 간혹 새로 온 작가 중에는 그게 부담스러워 한여름에 에어컨도 없는 복도에서 섭외를 하기도 하고, 옆 팀 작가의 섭외 소리에 위축이 된다며 어려움까지 호소하는 걸 보면 ‘기선제압’을 떠올리는 내 감이 영 틀린 건 아니지 싶다.
그러다 보니 노련함을 과시라도 하듯 너스레를 떨며 섭외를 하는 아이, 섭외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아이, 전화기를 들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아이들이 내게는 나름의 방식으로 기싸움을 하는 중으로 보인다. 그런 기싸움의 공기는 팽팽하기도 하고 때론 안쓰럽기도 하다. 이어폰을 끼고 한껏 친절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하며 쉴 새 없이 내용을 타이핑하는 모습에서 숨은 조바심이 가득 읽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었다. 특히 연차가 얼마 안됐을 때일수록 기선제압을 위해 다양한 형태로 나름의 수를 썼다. 새로 세팅된 프로그램에서 첫 대면하는 사이는 물론이거니와 아무리 편해진 사이라 해도 얼마큼의 기싸움은 주기적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피디 작가 간, 선후배 작가 간, 출연자와 작가 간, 스텝과 작가 간의 기운.
처음 만난 상대에게 기운이 밀리지 않으려 그동안 맡았던 프로그램들을 은근슬쩍 풀어놓거나, 거쳐온 제작사를 연관도 없는 대화에 끼우기도 했다. 불방의 상황을 가까스로 모면했던 후일담은 마치 배틀이라도 하듯 자랑했고 몇 되지도 않는 연예인 인맥까지 과시하는 등 기선제압의 행태는 노골적일 때도 있었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괜히 큰소리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상당히 발이 넓은 것처럼 보이는 데 자주 신경을 쓰기도 했었다. 때로는 기가 세 보여야 뭐라도 유리할 거 같은 착각에 방송가 은어들을 섞어 말을 거칠게 하거나 욕을 거침없이 하기도 했다. 돈과 호의를 쓰는 것에도 넘칠 때가 많았다.
비단 나만 그랬을까? 야외 촬영이나 스튜디오 녹화, 연예인 인터뷰 상황에서 괜히 기선제압을 하겠다고 애꿎은 작가나 후배에게 거칠게 굴었던 피디들에게 여러 번 맘이 상한 적 있는 걸 보면 이 싸움에 예외인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방송일을 하며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날수록 점점 느끼는 게 있다. 요란하고 노골적인 기운 자랑의 무용함에 대해서.
K는 우리팀에 오랜만에 들어온 남자 막내 작가이자 기존 남자작가들과는 좀 다른 캐릭터였다. 교과서 모범답안 같은 대화도, 매끄럽지 않은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진정성도 독특했다. 마치 대학교 방송 동아리 학생들이 학교 축제 섭외를 하는 느낌의 순수함이 랄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과연 섭외를 잘할까’, 내 직속 막내가 아니었음에도 걱정스러웠다. 다른 막내 작가들도 그런 K가 못미더웠는지, 자신의 섭외 스타일을 시범 삼아 보여주기도 하고, 안쓰러움에 이것저것 훈수를 두며 선의와 경쟁심이 섞인 호의를 베풀었다.
으레 새 막내들은 긴장이 사라지면 출근 시간부터 흐지부지된다. 그러다 슬슬 섭외 통화량이 줄고, 결국 요령이 열정을 이기는 지점이 온다.
“언니네 AI, 가동 시작했어”
친한 옆 팀의 작가가 가끔 톡을 보내온다. K의 출근을 알리며 하는 말이다. K는 ‘으레’라는 절차에 거의 부합하지 않았다. 출근 시간은 어김없었고, 한결같이 섭외에 정성이었다. 답사에 성공한 날에도 마치 당장 촬영할 자연인이 없는 듯 절박하게 통화를 해 ‘물 흐리지 말고 적당히 하라’는 장난스런 핀잔까지 들을 정도였다.
”정말 힘든 세월을 살아오셨네요. 그걸 견디고 산에 오신 것에 존경심이 느껴져요“
”선생님이 기쁘셨다니 저도 기쁘고 보람이 생깁니다. “
”추운 날씨에 피곤하셨을텐데 끝까지 열심히 촬영해 주셔서 제가 정말 감사드립니다“
”시청률이 좋았어요. 선생님의 진솔함이 시청자에게 전해진 덕분입니다“
옆 팀 작가 말대로 AI같은 그 아이의 말투는 듣고 있자면 피식 우습기도 했지만, 때때로 예고없이 뭉클함을 주기도 했다. 아마 당연한 인사말을 당연히 안하는 요즘, 교과서 같은 그 아이의 공감이 서툼과 어색함보다 더 와닿았던 모양이다.
K는 한 달에 한 명 찾아내기도 힘든 자연인을 꽤 많이 찾아냈고, 그만두면서도 후보 리스트를 잔뜩 넘겨주고 갈 만큼 일을 잘했다. 막내 작가의 다른 업무에 있어서도 모범이었고, 나에게도 자주 위로가 되는 말을 전해 감동을 주었다. 메인 작가, 피디들의 칭찬이 마르지 않는 걸 보며 다른 막내들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모르겠다. 느닷없이 K의 보도자료를 흉내 내거나 자연인 리스트를 ‘얼마나 숨겨두고 있냐’며 반 농담으로 K를 추궁했던 걸 보면, 못미더워 했던 동료에게 느끼는 위기의식이 마냥 편치는 않았던 듯 하다.
한 번은 ‘순하디 순해 보이는 피디’가 새로 온 적이 있었다. 촬영장을 총괄해 연출을 해야 하는 피디의 경우 기선제압은 더 필수적일지 모른다. 출연자를 비롯해 모든 스텝이 부리는 은근한 텃세, 때로는 노골적인 갑질까지... 촬영이 어찌될지 사뭇 궁금했었다. 역시나 몇 달간 촬영 때마다 다소간의 불협화음, 소란한 투닥임들이 들려왔다. 내심 ‘버티겠나’ 싶어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얼마 뒤 ‘순하디 순한 피디’가 조용히 묵직하게 현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들어 결국 기운을 자기답게 쓴 사람의 뭉근한 힘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방향으로 자신의 속도대로 기운을 쓰다 보면 그 기운은 가장 자기 답게 흘러나와 힘을 가지게 되었던 거 같다.
애초에 누구의 기운을 제압하고 말고의 필요 조자 없었을지 모른다.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나의 기운이 아닌 것을 쓰려 했던 순간엔 그저 민낯이 드러날 뿐이었고, 내 기운보다 과도하게 쓴 것은 나를 소진시켰다.
각자 자기가 가진 기운을 분량대로 쓰면 되었고 그 시간 동안 차곡차곡 나는 더 나다워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온전히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임을 이제는 느낀다.
여기에 생각이 이르고 나니, 이제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누구를 만나더라도 괜한 기운을 쓰기 위해 애쓰지 않게 되었다.
내가 가진 만큼의 기운을 나답게 쓰자고 마음 먹고 난 뒤 전에 없던 평온함도 찾아왔다. 기운을 낭비하지 않으니 그것 또한 내게 득일 것이다.
결국 기선제압은 그 자체가 무용했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