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최고 시즌은 비수기다
몽골로 가는 저가 항공기가 텅텅 비었다. 이렇게 사람이 없을 줄 몰랐다. 비수기는 비수기인가 보다. 덕분에 두 다리 쫙 펴고 비즈니스 좌석 기분을 만끽했다. 괜히 항공사가 걱정된다. 하하하, 그래. 괜한 걱정이다.
내 걱정이나 하자. 텅 빈 비행기는 가볍게 이륙했다.
10월 13일 00시 50분, 몽골 칭기즈 칸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관이 호텔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호텔도 아니고, 아파트먼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우물쭈물했다. 그런 나를 보고 '이비스?'라고 했다. 내 앞에 간 한국 사람이 이비스라고 했나 보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라고 말했다. 심사관이 여권에 도장을 쾅하고 찍었다.
위탁 수하물을 부치지 않아서 1등으로 입국장으로 향했다. 자동문이 스스르 열렸다. 입국장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휴대폰을 들었다. 휴대폰 액정 속 한국 이름들이 깜빡거렸다. 가이드나 픽업 나온 사람들인 거 같았다. 그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치 ‘너야?’라고 묻는 듯 내게 고갯짓 했다. 다른 사람도 내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나는 온전히 혼자 여행할 것이라는 자부심을 눈빛에 가득 담아 고개를 가로저으며 쿨하게 방향을 틀었다.
풍문으로 들었던 ATM기를 찾아 작은 공항을 한 바퀴 둘러봤다. 입국장 우측에 있었다. 제일 우측 ATM에서 10만 투그릭을 눌렀다. 안된다. 다시 처음부터. 몇 번 시도 끝에 인출했다. 한화 약 4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다. 듣던 대로 수수료는 없었다. 혹시나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이 있나 싶어 공항 한 바퀴 더 돌았다. 택시비를 반반씩 내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가 ATM기를 붙잡고 있는 시간 동안 사람들이 공항을 대부분 빠져나간 것 같다. 공항이 텅텅 빈 거 같다.
택시 기사로 보이는 사람과 눈이 맞았다. '택시?'라고 말하니, 휴대폰 계산기에 10만을 찍었다. 나는 8만을 찍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쿨하게 뒤돌아 가버렸다. 마치 아까 나처럼 말이다. 아니, 뭔가 주고받는 게 있어야지. 내가 10만 찍으면 자기는 9만 찍고, 그럼 나는 다시 8만 5천 찍고, 원래 흥정은 다 그렇게 하는 건데. 영화도 안 보나.
다른 남자 한 명이 다가와 자신의 휴대폰을 보여줬다. 10만이 찍혀 있었다. 나는 그의 휴대폰에 다시 8만을 찍어 건넸다. 그러자 그는 다시 휴대폰에 숫자를 찍었다. 그래. 이 남자는 영화를 좀 본 거 같다. 이게 흥정이지. 그가 내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9만이 찍혀 있었다. 내가 휴대폰에 손을 가져가자, 남자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나도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안 된다는 남자의 단호한 표정. 휴대폰을 뺏어 8만 5천을 찍을까 했지만, 내가 기세에 밀렸다. 내가 졌다. 결국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오케이'라고 말했다.
흥정할 땐 단호한 표정, 하나 배웠다.
새벽 1시 30분. 택시가 공항을 빠져나왔다. 주위가 깜깜하다.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140km로 뻥 뚫린 도로를 질주한다. 내 휴대폰 앱에서는 도착 시간이 45분 뒤라고 적혀있다. 거리가 꽤 멀다. 보통 울란바토르 시내까지 10만인데, 내가 9만으로 깎아 이러는 걸까. 분노의 질주인 거 같다. 이 남자는 정말 영화를 많이 봤나 보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속도감. 슬며시 안전벨트를 다시 조였다. 앞자리에 괜히 앉았나 싶기도 하다. 9만 투그릭은 우리나라 돈으로 약 36,000원. 지금 시간과 거리를 생각하면 결코 많은 금액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괜히 깎았나 싶다. 남자가 몽골 음악을 틀었다. 흥얼거리며 따라 부른다. 졸음을 쫓으려는 거 같다. 이 속도에 졸리다니, 짠한 모습에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든다.
남자의 질주 본능은 울란바토르 시내로 들어 서자 사그라들었다. 어둠 속에서 낯익은 한글 간판과 브랜드 이름이 유독 진하게 보인다. 한국에서 많이 본 편의점이 몇 개나 지나갔다. 너무 친숙하다. 속도가 줄어 드니 이제 내가 졸리다. 비몽사몽 해서 그럴까. 한국인 거 같은 착각도 든다. 술 한잔하고 집에 가는 택시 탄 거 같다.
새벽 2시 30분. 숙소 근처에서 내렸다. 숙소는 수흐 바타르 광장에서 도보 10분 거리다. 근대 이렇게 어둡다고? 내가 공항에서 하도 고개를 가로저어서 그런가. 가로등이 없다. 손전등을 꺼냈다. 챙겨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후레쉬 불빛으로 숙소로 가는 샛길을 찾았다. 숙박 앱에서 알려준 건물 비밀번호를 눌렀다. 2층으로 올라가 다시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와우. 3성급 호텔보다 가격이 저렴해서 기대도 안 했는데, 사진이랑 똑같았다. 비수기는 비수기다. 혼자 잠들기엔 방이 너무 과하게 크고 좋다. 그래서 졸음이 사라진 걸까. 갑자기 혼자인 게 서글퍼진다. 이 마음 소맥으로 달래야겠다.
마침 숙소 앞에 CU 편의점이 있다. 물 건너온 한국 물건들은 대부분 비싸지만, 몽골 제품들은 비교적 저렴했다. 컵라면과 몽골 맥주, 그리고 마실 물을 샀다. 소주는 한국 공항에서 구입한 게 있었다. 술을 조금 더 살까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또 가로저었다.
물을 팔팔 끓여 컵라면에 부었다. 앞으로 3분. 세상에서 가장 긴 시간이다. 그래서 다른 짓을 해야 한다. 짐을 풀었다.
어라. 충전기가 안 보인다. 가방 구석구석 작은 주머니를 뒤졌다. 그래도 안 보인다. 노트북 충전기라 꽤 비싼 건데. 김해 공항에서 충전을 잠시 했던 게 생각났다. 공항에 두고 왔다. 그러고 보니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첫날 충전기를 잃어버렸었다. 그땐 파리 호텔에 두고 왔었다.
몽골에서까지 첫날부터 충전기가 없다니. 와,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고용량 노트북 충전기 딱 하나 챙겨 왔는데 말이다. 이제 카메라, 마이크, 노트북, 그리고 휴대폰 배터리도 비수기에 들어간다.
그래, 충전기는 김해 공항에 두고 온 게 아니다. 아까 택시에서 느꼈던 것처럼, 술 한잔하고 택시에 두고 내린 거라고 치자. 아놔. 그새 라면이 퉁퉁 불어 터졌네. 그래, 3분은 생각 외로 짧은 시간이라고 치자. 이 정도 정신 승리는 탑재하고 몽골 여행하자.
그래서 소맥이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