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와 M 만 존재하는 차가운 현실

feat. 2주 뒤면 웨딩인데 내 드레스는 어디에...?

by 최리나

난 지금 노트북에 타이핑을 하는 중간중간에 아침식사로 짓이겨진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씹어가며 입안에 넣고 있다.

'씹어서 입 안에 넣는다'는 표현이 아주 적절하다.



솔직히 질려서 맛도 잘 모르겠고 다만


'채소와 달걀, 호밀빵으로 조합이 된 이 샌드위치를 먹으면
그나마 지방으로 덜 쌓이겠지.'


라고 위안 삼으며 주린 배를 채울 요량으로 먹는 중이기 때문이다.



2주 뒤이면 고심 끝에 결정한 스몰 웨딩을 올리는 나는 최근 결혼식 때 입을 웨딩드레스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가 충격을 받고 급격한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되었다.

아무리 스몰 웨딩이라지만 명색이 결혼식인데 신부인 내가 웨딩드레스 정도는 입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몇 주전부터 눈알이 충혈될 정도로 밤낮으로 '스몰웨딩드레스'라는 키워드로 검색질을 하다가 마음에 쏙 드는 드레스를 발견하고 난 과감히 질렀다.




드레스는 꽤 일찍 도착했다.

설렘 가득 안고 상자를 풀고 입어봤는데, 그런데...

뚜둥!

분명 정사이즈라고 해서 평소 55~55반을 입는 나의 사이즈에 맞게 M을 주문했건만, 뒷 지퍼가 초반부터 올라가지 않는 것이다.

'이럴 리 없어'


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여기고 사이즈 태그를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정말 부르고 싶지 않았던 남편을 급히 소환하여 도움을 요청하고 지퍼를 힘껏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남편: 자기야 안 될 것 같아.


나: 그냥 과감하게 올려! 할 수 있어! 자, 내가 배에 힘을 주고 최대한~ 집어넣어 볼게.


난 지퍼가 올라가지 않는 것은 어느새 곳곳에 달라붙어 있는 나의 지방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남편의 서투른 손 때문이라고, 그의 과감하지 못한 성격 탓이라며 엉뚱하게 그에게 분풀이를 하며 투덜댔다.


남편: 자기야, 이거 이러다 지퍼 나가~~ 그냥 사이즈를 교환해. 안 돼, 안 돼.


그는 약간 짜증 난 어조로 내게 말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는 자리를 떴다.


이상하네... 아니 여전히 다른 M 사이즈 옷들이 잘만 맞는데 왜 이러는 걸까?


남편을 애처로운 눈망울로 쳐다보며 계속 불러댔으나 그는 확신이 선 듯 나에게 단호히 L사이즈로 교환을 하라고 강권했다.

주문했던 상세 페이지에서 내가 뭔가 놓친 것이 있지는 않은지 상세정보와 후기들을 다시 꼼꼼하게 읽고서 혼자 고민에 빠졌다.

십여 분 정도 후, 난 잠시 자책의 시간에 빠졌다.



그래, 그 페스츄리 오징어를 밤마다 처묵처묵 하는 게 아니었어!
죄다 염분이잖아. 못 살아 진짜...
어쩌자고 매일 밤 그 페스츄리 오징어를 먹었을까.


아니었다.

가만히 내 마음속 소리에 귀 기울여 보니 난 '자책'이 아니라 이번에는 애먼 페스츄리 오징어 탓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사랑했던 나의 간식거리이자 세상에 이런 음식이 어떻게 발명된 거냐며 존재 자체를 찬탄하고

심지어 주변 지인들에게 판매 사이트를 보내주기까지 하며 강력히 추천했던 바로 그 페스츄리 오징어에게서 난 단숨에 등을 돌려버리다 못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렇지, 염분 덩어리지.
염분을 그렇게 먹으면 밤에 물도 엄청 먹게 되고...
그리고 그게 맥주랑 같이 먹어야 제맛이라서...
아... 맥주도 문제네!



이제 맥주, 네가 죄인이 될 차례였다.

이쯤 되니 내가 참으로 비열한 것 같다.

먹은 내가 잘못이지 페스츄리 오징어와 맥주가 뭔 죄람.



정신 차려!
맛있다며 니 돈 주고 네가 산거야!



운동을 멀리하고 밤늦게 매일 페스츄리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가며 흐뭇해하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그렇게 환호하던 대상을 한순간에 원망하고 있는 내가 치졸하고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이 옹졸한 나는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드레스 사이즈를 L로 교환했다.

내 45년 인생 처음으로 의류에서 L 사이즈를 입어보는 역사적인 날은 다음 날 곧바로 내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맞겠지?
그래, L이면 어때?
핏이 이쁘게 나오는 게 더 중요하지. 히히~



그새 마음이 열려서 신나게 옷을 입어보는데... 이게 웬걸?

오 마이 갓! 또 안 맞는 것이 아닌가!


남편: 음... 윗부분이 안 잠기는데...? 흠...


매우 난감스럽다는 듯 그가 어렵사리 내게 말했다.


나: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거 L사이즈야. 잠깐! 내가 가슴 부위 때문에 그런가 본데...
가슴을 좀 눌러볼게. 나 숨 참는다.

우리 할 수 있어, 여보!
자기야 다시 한번 해봐.
내가 카운트할게, 셋 세면 올려. 알았지?

하나, 둘, 셋!


!








다음 날, 난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그 웨딩드레스 회사로 전화를 해야 했다.


담당자: 네, OOO입니다.


나: 여.. 보세요...? 저 거기서 어제 사이즈 교환했던..

네.. 네.. 저 기억하시죠?

저... L사이즈도 안 맞아요. ㅜㅜ

어쩜 이럴 수가 있죠? 흑... L이 안 맞아요!

담당자님 저 어떡하면 좋아요~~~!


난 거의 그녀에게 매달리다시피 애걸하며 전화기를 붙잡고 울먹였다.


어제 드레스가 결국 잠기지 않은 것이다.

라지 사이즈가 안 맞다니... 고 몇 달 사이에 내 몸이 그 정도로 퍼진 것인가?

이것은 66도 안 맞는다는 건데 내가 그 정도로 지금 살이 많이 찐 거 같지 않아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결국 그 웨딩드레스는 반품했고, 의기소침해지다 못해 숙연해진 나는 다른 드레스들을 또 물색해야 했다.


너무 많은 쇼핑몰과 반복된 드레스들을 보게 된 내 동공은 이미 반쯤 풀려있었다.

수많은 웨딩드레스와 사이즈를 보며 back, 또다시 back 버튼을 누르는데 손가락도 지쳤다.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보면 사이즈가 S와 M만 존재했다.

그런데 사이트를 돌아다니고 사이즈를 면밀하게 재다가 신기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건 바로 웨딩드레스 계에 거의 실제 L사이즈가 없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실측을 보면 일반적인 옷들의 44반 사이즈가 M, 55반 사이즈가 L사이즈였고, 심지어 옵션에 L사이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이트들도 많았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내 안에 감정 어휘가 하나 들어섰다.


드럽군!



더럽고 또 더러웠다.

도대체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결혼식을 올리라는 말인가?

우리나라에는 44와 55만 존재하는 것인가?

실제 우리나라 여성들이 그렇게 마르기만 한 것인가?


내가 알기론 아닌데, 분명 아닌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영문도 모르겠고, 난 무엇을 입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i c... 그냥 흰 원피스를 아무거나 사서 입어버려?



이젠 뭐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쇼핑질과 반품에 의욕도 떨어졌다.

다이어트를 여전히 하고는 있으나 입을 옷이 없다는 생각에 우울함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런 나의 속을 모르는 남편이 나에게 아들의 숟가락을 써보면 밥을 좀 더 천천히 먹게 되지 않겠냐, 그러면 당신의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난 아무 말 없이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는 듯 그에게서 아들내미의 작은 숟가락을 받아 들고 무념무상으로 밥알을 꼭꼭 씹어댔다.


식사 후 위안을 얻기 위해 나의 베프들과의 단톡방에 톡을 썼다.


나: 하아... 입을 드레스가 없다. 괜히 우울해.
내 몸뚱이가 문제구나 싶네.
아니 요새 드레스들이 왜 이렇게 비현실적인 사이즈인 거야?

Y: 그러게요. 비현실적인가 봐요.

나: 이러니까 우울증이 심해지는 거야. 비현실적인 걸 현실에서 강요하니까 문제야.

J: 맞아요. 남편이 저 밥 퍼줄 때 적게 줄려고 하는 거... 짜증 나요...
할 일도 산더미인데 내가 해놓은 밥 맘껏 먹지도 못하게 하는 더러운 세상...

나: 어머... 진짜 그래? 와이프 자체 관리 들어가는 거니? 너네 남편 대단하시다.

J: 일단 "응 더 먹고 싶으면 내가 더 퍼올게 고마워" 하고 주는 대로 받긴 하는데...(이미 기분이 상했어요)

나: 열심히 노동하고 왔으니 기분 상할 수 있지.
각자 밥 퍼서 먹자고 해.
내 밥그릇은 내가 챙기겠다고. ㅋㅋㅋ
난 남편이 쏭이 숟가락으로 밥 먹으면 좀
천천히 먹지 않겠냐며 앞으로 애 숟가락으로
먹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더라.
그래서 오늘 쏭이 숟가락으로 밥 먹었어. ㅡㅡ;

J: 뜨앗! 쏭이 숟가락..!
그래도 밥 조금 주는 것보단 뭔가 더 따뜻하네요...

Y: ㅠㅠ 웬일 들입니까.

나: 중년 여성들의 집안 밥상머리 실태보고네.


친구들과의 카톡으로 위로를 받으려던 나는 요즘 중년 여성의 현실은 이런 건가 더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하하거리며 마무리 하긴 했으나 J의 소녀 같은 풋풋한 모습을 아는 나로서는 그녀의 남편의 '아내 밥그릇 관리' 소식을 듣고 적잖게 놀랐는지 그날 계속 머릿속에 그들과의 대화가 둥둥 떠돌아다녔다.

그녀의 남편도 알고 있던 터라 나는 왠지 그녀의 남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이쁜 아내가 지금처럼 건강하고 오래오래 아리따운 모습을 유지하기 바라서가 아닐까?


-S와 M만 존재하는 웨딩 패션만의 리그

-그리고 밥상에서 남편으로부터 관리받는 우리네 아내들

-간식계의 혁명이라 일컬을 수 있는 페스츄리 오징어에 홀딱 빠져 정신줄 놓고 살았더니 어느새 결혼식에서 입을 웨딩드레스가 없어서 하루하루 코르티솔이 뿜뿜 분비되고 있는 나


여러 생각이 교체하는 하루였다.

이 와중에 웃지 못할 희소식이 생겨버렸다!



내 몸에 맞는 웨딩드레스 찾아 헤매다 보니 내 입맛이 뚝! 떨어졌다.




-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