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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나 Nov 09. 2022

사는 게 '괜찮은' 사람은 안 읽어도 되는 이야기

feat. 괜찮아 홀릭



또 괜찮다는 책이 나왔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한다면,

난 서점을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

종이 냄새가 폴폴 풍기는 서점을 나는 사랑한다.


서점에 들어서면 먼저 따끈따끈한 신간 코너부터 돌고, 베스트셀러도 살피며 '아직도 저 책이 베셀에 있구나...' 활발하게 순환하지 못하는 도서 시장에 잠시 탄식을 내뱉은 후 내가 서점에 온 목적지로 향한다.

난 그제사 오늘 봐야 하는 분야 서적이 있는 곳에 가서 샅샅이 이 잡듯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책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제 누군가의 책을 기획 출간해줘야 하는 입장이 되어서 그에 따른 묵중한 책임감에 나의 눈은 전보다 더 매서워졌다.


지난 주말, 난 신혼여행 중이었지만 집필하시는 수강생분의 참고 도서를 검토하기 위해 대형 문고에 들러야 했다.



남편은 소설책을 하나 집어 들고 모퉁이에 마련되어 있는 소파에 걸터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고, 난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눈으로 침을 흘리며 신간 도서 쪽을 향해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설렘을 안고 두 눈을 번쩍 뜬 채 책들을 보다가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해도 괜찮다'는 책이 왜 이리 많지?




도대체 얼마나 괜찮다는 걸까?
아니 괜찮다는 게 뭘까?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아지면 되는 걸까?
또 괜찮지 않은 건 무엇인가?
좀 괜찮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유사한 제목들이 적힌 책들을 보면서 살짝 염증을 느꼈다.

아무리 요즘 사는 것이 빡빡하고 힘들다지만 비슷한 제목으로 나온 도서가 어쩌면 이렇게 많은 건지.

'이래도 괜찮아, 저래도 괜찮아, 너라서 괜찮아, 모자라도 괜찮아, 있는 그대로 괜찮아.'

각양각색의 <~해도 괜찮아>라는 제목을 가진 도서가 '나 좀 봐주세요'라며 예쁜 옷을 입고 손을 흔들었다.


'앞서 나온 <괜찮아> 책을 읽고 괜찮아진 사람들이 또 새로 나온 괜찮아책을 사서 읽을까?' 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미 그 책을 접한 독자는 글로써 '괜찮아 예방주사'를 맞았으니 단단한 면역력이 생성되었을 테다.

그렇다면 이제 평온하게 잘살고 있을 텐데 과연 비스름한 내용으로 채워진 도서를 또 구매해서 읽을까?

아니 괜찮아책을 읽은 독자라면 다시 비슷한 콘텐츠의 책을 읽지 않아야, 진정 그 도서가 '~해도 괜찮다'며 땀 흘려 일한 보람이 있을 거 아닌가!  저자도 집필하는 동안 각고의 심혈을 기울였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책 한두 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괜찮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많다는 걸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잠시 서점에 비치된 신간도서들과 베스트셀러 전시코너를 두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면서 목석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생각이 열리고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무수한 물음표가 달린 꼬리는 길어져서 급기야 이런 질문에 당도했다.



'이 책을 읽으면 정말 괜찮아질까?'



판타지 영화 '해리포터'에 보면 마법의 폴리주스가 나온다.

주스를 꿀꺽 마시면 약효가 떨어지기 전까지 원하는 사람으로 한동안 변할 수 있다.

이 괜찮아 책들을 읽고 나면 마법처럼 괜찮아진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 괜찮아 책들은 그 어떤 괜찮지 않음도 다 치유해 줄 수 있을까?



호기심 어린 나는 괜찮아 부류의 책을 마구 집어 들고 하나씩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나갔다.

책 내용이 좋으니 독자가 이 어려운 시국에 값을 치르며 사지 않았겠는가.

요즘처럼 책을 안 읽는 시대에 말이다.  

그렇다면 분명 그만한 값어치가 들어 있지 않을까.


난 한참 동안 괜찮아 책들을 모두 훑어보고 조용히 덮었다.


공허하다.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책은 좋다, 나와의 코드가 삐끗 엇나갔을 뿐.

모든 작가분의 글도 햇볕처럼 따스하고, 위로를 주는 책인 건 분명했으나 그저 독자로서 '나라는 사람'과는 맞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괜찮다'라는 의미는 이러하다.


지금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고, 난 어째서 괜찮지 않은지,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그 원인과 나, 자아에 대하여 깊이 고찰하고 마주하는 것.


그것이 '진정 괜찮아지는 것'이라 믿는다. 


이게 내가 심리학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  나는 가끔 괜찮지 않으니까.

엄마 말에 따르면 아빠가 내 치유 에세이를 읽으셨다던데.
아빠는 4년째, 여전히 연락 두절이다.

그 때문에 이따금 우울해지거나
'날 정말 딸로 생각한 적이 있긴 한 거야?!' 라며 울컥 올라올 때도 있다.


그리고는 이로써 지금의 내가 자식들에게 어떤 엄마인지 돌아보게 된다.

타인의 시선과 권위가 더 중요한 부모와 환경 아래서 자란 나라는 사람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언행.

에 의해 자칫 역시 내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기에 내 말과 행동을 경계하고, 스스로 토닥토닥 다독이기도 한다.



니 잘못이 아니라고.
넌 부모에게 있는 그대로를 인정받지 못해서 슬픈 거라고.
시대의 고정관념과 어긋난 기대 때문에 외면한 부모 때문에 서러울 뿐이라고.



이렇게 원인을 파악하고 사실을 받아들이면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덕분에, 적어도 나는 살면서 남 탓만 해대며 삐뚤어진 사고와 관행을 이어가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나는 하루하루 더 나은 어른이 되는 곳을 향해 내 눈길과 발길을 옮긴다.






괜찮음과 괜찮지 않음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분명치 않은 것이 우리 인간이다.


어제까지 괜찮은 감정을 가지고 살았다가 오늘부터 괜찮지 않을 수 있다.

과거부터 괜찮지 않았는데 괜찮다고 착각하며 살다가 불현듯 성인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서

'거참~ 나 좀 봐줘, 주인장아! 나 몹시 아프다고!'라고 외쳐대서 괜찮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기도 한다.

역으로 평생을 괜찮지 않다가 부단한 노력으로 충분히 괜찮아질  있다.


지금 나는 괜찮은가? 아니 괜찮지 않은가?
괜찮지 않다면 왜 그런 걸까?


얼마 후 우린 모두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된다.

자기 계발하기 바쁘고, 트렌드를 따라 사는 것도 좋고, 타인과의 관계에 공을 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내 안에 홀로 있는 나'를 바라봐주면 어떨까?

따각따각 말을 타고 가다가 내 그림자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돌아보는 지혜로운 인디언들처럼 말이다.

살면서 '돌아봄'과 '쉼'이라는 두 가지를 잠시 갖는다면 인생이 한결 나아질 텐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하하!


이날 서점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서점에 '응, 난 지금 괜찮지 않아'라는 제목으로 위풍당당하게 뽐내며 나오는 책들도 많았으면 좋겠다며.

실은 우리 모두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



괜찮지 않은 우리이기에
 서로의 등에 기대며 사는 것이 바로 사람(人) 아닐까?



중요한 건, '괜찮고 안 괜찮고'가 아니라

내가 괜찮지 않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괜찮아'라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진리이다.


나는 작년에 그간 쌓인 우울증과 자기혐오까지 올라오는 내 안의 나에 의해 눌려 죽고 싶지 않아서 사십여 일 동안 지난 나의 을 A4 종이에 고스란히 옮겨 적었다.

살고 싶었다.

글을 쓰고 나니 "안녕! 네가 상처받은 나로구나." 하고 진정한 나와 조우하게 되었다.

1년이 지난 이 시점, 난 훨씬 괜찮게, 그리고 아주 가끔만 괜찮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지금 자신에게서 한 발자국 성큼 떨어져서 스스로를 바라본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의 괜찮지 않음이 서서히 줄어들 수 있는 시작이다.

타인에 의한 위로도 좋지만 가장 훌륭한 치료제는 '나를 관찰하고 사랑해주는 것'임을, 꼭 잊지 않았으면 한다.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위대하다.


고로 우리 모두는 이미 살 가치가 있는, 아주 괜찮은 존재이다.



괜찮은 혹은 괜찮지 않은, 오늘을 보내는 소중한 당신에게...


- The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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