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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나 작가 Jan 12. 2023

파란 내복 입은 아이와 늑대 엄마의 가사노동 실화

feat. 약속을 지키는 아이로 키우는 법

이 이야기는 한 엄마가 몸무게 21.9kg에 키가 125cm 정도 되는 여덟 살 아들을 가사 노동의 길로 안내한 실화이다.

구체적으로 아이의 신체치수를 적고 나니 대체적으로 엄마가 사악하게 느껴지는데...

이건 순전히 숫자 탓일 게다.

이 아들이 가사 노동으로 입문하게 된 발단은 '산타할아버지와의 약속'이다.




때는 바야흐로 벌써 작년이 된 크리스마스이브, 송도로 외식하러 가는 택시 안에서 아들과 우리 부부가 주고받은 '과연 이번에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대화를 나누던 시간이다.

아들은 선물과 집안일을 맞교환하려 했다.



만약 산타할아버지가 이번에 선물 주시면,
난 엄마아빠 말도 더 잘 듣고, 학교 갔다 와서 내가 할 일 먼저 하고 놀 거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또... 집안일도 할 거야!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너무나도 받고 싶은 마음에 초1 아들이 무리수를 던졌다.

길이 아닌 겁을 잃은 어린양.

집안일을 귀찮아하는 엄마늑대 앞에서 '나 잡수시오~'라고 말하다니.

막상 한 해 동안 본인이 한 행동을 곰곰이 되짚어보니 산타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못 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걸까?

자기 할 일조차 겨우겨우 하는 8살 남자아이가 빨래를 하겠다느니 설거지를 전부 하겠다느니 마치 선거 공약과 같은 말들을 마구 내뱉었다.



"지키지 못할 말을 막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 거니까."


 

엄마는 아들에게 '약속'의 개념을 제대로 심어주고 싶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평생 아이들 교육을 해 온 어미인지라 약속의 무게를 자식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생각이 우선이었다.

엄마가 아이에게 조언하자, 아들은 정신을 부여잡고 잠시 생각해 보겠다며 말을 바꿨다.

시름에 빠진 아들에게 엄마는 할 수 있는 집안일 예시를 주겠노라 말했다.


엄마: 바닥닦개로 방과 거실 바닥 닦기, 아니면 주 1회 설거지하기, 빨래 개기, 혹은 수건만 개기도 쏭이가 할 수 있을 거 같고...


그렇다.

선의에 어느새 본능이 껴들었다.

케케케, 애가 자발적으로 한다잖아.
이런 게 기회가 아니고 뭐겠어?
이참에 집안일 하나 줄여보자고.
아이한테도 나쁠 거 없잖아?
독립심도 키워주고 일찌감치 집안일 가르쳐놓으면 커서 제 앞가림하겠지.
이것도 다 산 교육이야!


일감을 나누고픈 본능은 그녀의 사고를 장악해 버렸다.

늑대 엄마는 말끝을 흐리며 딱 봐도 아이가 하기 힘든 집안 일과 만만한 집안일을 섞어서 후보로 흩뿌려줬다.

엄마는 아이에게 말하면서 속으로 '그것'을 고르기를 빌며, 문장 끝에 힘을 실었다.


괜히 어설프게 설거지를 했다가 일을 두 번 하게 되거나 살림살이를 깨버리는 걸 원치 않았던 엄마.

아이가 바닥을 닦겠다며 온몸으로 비벼 싸며 다니지 않길 바라는 엄마.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던 엄마라는 사람은 아들이 해주길 바라는 집안일을 은근슬쩍 끝에 끼워 넣어서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했다.

약아빠졌다.



엄마, 나 결정했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시면
내가 모든 수건을 다 갤께!




'아싸!'

엄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렸으나, 짐짓 염려스러운 듯 정말 괜찮겠냐며 걱정의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한 번 더 물었다.

아들은 그런 엄마의 물음에 더욱 확고해졌다.


엄마: 그럼 지금부터 잠시 눈감고 산타할아버지에게 그 다짐을 말해. 그래야 할아버지가 쏭이 다짐을 들으시지. 핀란드가 여기서 꽤 멀거든. 하지만 미러볼 같은 걸로 보실 수 있을 거야.


간악한 엄마.


아들: 산타할아버지! 오늘 밤 제가 잘 때 선물 주시면 앞으로 엄마아빠 말도 더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요. 집에 오면 할 일도 알아서 하고, 우리 집 수건들을 모두 갤게요, 약속해요!


"약속해요...! 약속해요...! 약속해요...!"



아들의 맨 마지막 문장이 엄마의 귓가에서 메아리처럼 맴돌고 그녀의 심금을 울렸다.

천상의 메아리가 들린다.


'할렐루야!!!'



그녀의 아들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버스는 떠났고,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다는 것은 온 세상이 아는 이치 아니던가.

옆에서 이 광경을 조용히 관망하던 그녀의 남편이 갑자기 씩 웃는다.

그녀가 남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입 큰 고양이가 떠올랐다.



그의 미소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들, 드디어 너도 들어왔구나.
아빠가 발 담그고 있는 세계에 온 걸 환영해!'

 

그가 아들의 다짐을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남편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아 보였다.

이제 그에게 가사 노동의 동지가 생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겁 없는 아들의 엄마와 아빠는 아이가 산타할아버지에게 한 약속으로 마치 그들이 선물을 받은 것처럼 가슴 벅찼다.




자, 그럼 지난 크리스마스에 그녀의, 아니 내 아들이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았을까?

당연히 받았다!

받았고 말고.

글씨를 읽을 수 있는 아들이 나중에라도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산타할아버지가 착한 쏭이의 기특한 의지를 보셔서 선물을 주신 거라는 걸 꼭 기억했으면 한다.  


선물을 받은 후 쏭이의 주간 일상은 평소보다 더 바빠졌다.

학교를 다녀오면 일단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쉰다. 그리고는 "물병은 꺼냈니?"라는 엄마의 단골 멘트가 떨어지기 무섭게 가방을 열고 물병을 잽싸게 꺼내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빠에게 전달한다.

그다음 "손은 닦았어?"라고 엄마가 말하면 얼른 화장실을 향해 돌진한다.

쏭이는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이 녀석이 여덟 살이 되고 나더니 눈치가 89단으로 급격히 늘었다. (백 단까지는 시간이 좀 소요될 것 같다.)

밥을 먹으며 수다를 늘어지게 떨다가 식사를 마친 후 북패드로 AI를 하고 책을 읽고 나면 밤 9시가 좀 넘는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같다.


달라진 게 있다면 산타할아버지와 약속하고 선물을 받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부터, 내가 주 2~3회 정도 자려는 아들을 이 말로 붙잡는다.


"오늘 수건 빨은 거 다 말랐어, 아들"



난 조용히 마른 수건더미를 아들 앞에 내려놓는다.

아주 미세한 한숨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지만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아들 녀석은 하기 싫다거나 안 하면 안 되냐는 말을 아직까지 내비치지 않았다.  

뭐 그래봤자 크리스마스 지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소리가 나올 정도는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착하다.


나름 각 잡고 수건을 개는 여덟 살 쏭이

  

역시 사람은 뭐든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느는 것 같다.

아들은 직사각형 모양의 수건을 가로로 바닥에 반듯하게 펼친 후, 절반을 접고 또 그 절반의 절반을 접는다.

4분의 1 크기가 된 수건을 한번 꾹 눌러서 마른 수건의 숨을 죽인 후 삼단으로 접어 놓는다.

이때 주요 포인트는 수건의 양 끝단을 잘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각 잡아서' 개야 한다.

엄마가 알려 준 그 수건 접기의 핵심을 어린 아들은 잊지 않았다.


몰아서 빨래를 한 날에는 본인 앉은키만큼 수건이 쌓일 때도 있지만 뭐라 뭐라 말하면서 수건을 갠다.

여덟 살 아들은 수건을 개는 십 여분 내내 혼자 중얼댄다.

'입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는 걸 보니 내 새끼가 틀림없구나' 싶어 수건을 개며 혼잣말하는 아들의 여윈 뒷모습에 가슴이 잠시 뭉클해진다.


엄마! 다 했어!


나: 어머 잘했어, 아들! 이제 제법이네~~!


수건을 갠 모양이 매우 흡족하지 않더라도 굳이 두 번 손대지 않는다.

난 아들에게 듬뿍 칭찬해 주며 그냥 아들이 갠, 그 상태 그대로 수건을 옮겨 화장실 선반 안에 넣는다.

자고로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고 했다.


'수건이야 어차피 다시 펴서 쓸건대 뭐.'





이렇게 집안일 하나를 아들에게 온전히 인수인계했고, 약속의 중요성도 가르쳤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그리고 내후년에도 아들에게 가사 일을 하나씩, 천천히 넘길 예정이다.

이 방법을 좀 오래 이어가기 위해 크리스마스 날, <크리스마스 연대기>라는 영화를 온 가족이 함께 보았다.



뭐랄까?

감동과 더불어 산타할아버지에 대한 강력한 믿음까지 듬뿍 얻을 수 있는 영화였다.

나 같은(?) 엄마에게 이 영화를 강추하고 싶다.

나 같은 엄마가 어떤 엄마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냥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며 동시에 집안 일과 약속에 대해 교육시키는 일타쓰리피를 노리는 엄마라고 해두자.


아들은 어리지만 자신이 큰소리치며 말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온 힘을 다 한다.

아이가 약속을 지키는 태도를 지니기 위해선 부모도 자녀와의 약속을 지킬 줄 아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또한 부모가 적당한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부모부터 아이 앞에서 해야 할 도리를 다 해야 할 것이다.


여덟 살 아이는 오늘도 말린 수건을 갠다.

본인이 말한 대로 군소리 없이 수건을 개는 어린 아들을 볼 때마다 나도 엄마로서 각오를 다진다.

아이가 자랄수록 아이 앞에서 내 언행에 더욱 신중을 기한다.

약속대로 수건을 개는 우리 아들에게 감사하다.


수건을 잘 개든 서툴게 개든, 약속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널 사랑해, 아들!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이 글을 못 찾아 읽기를 바라며...)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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