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고 지속가능한 채식을 향해
먹는 행위에 진심인 먹짱들은 흔히 계시를 받는다. '오늘은 김치찌개를 먹어라', '오늘은 피자가 아니면 안 된다'. 먹신의 목소리인지 무의식에서 발현된 목소리인지 모르지만 특정 음식이 정전기 오듯 파지직! 하고 뇌를 관통하는 것이다. 그럼 메시아의 목소리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저항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어차피 돌고 돌아 그 음식 앞으로 가게 되어 있으니.
며칠 전에도 계시를 받았다. '월남쌈을 먹어라'. 생리를 시작한 이후 매운 라면이니 짜장면이니 온갖 자극적인 음식으로 점철된 식사를 하다 보니 몸이 견디질 못했나 보다. 계속 화장실에 들락날락하고 헛트림이 나오는 게 몸이 시위하는구나 싶었다. 그때 월남쌈이 생각났고 항상 반찬을 고민하는 엄마의 시름을 덜어주었다(?). 파프리카, 오이, 당근, 파인애플, 아보카도, 맛살 등 야채로 구성된 월남쌈은 몸이 찾았다는 걸 증명하듯 정말 맛있었다. 라이스페이퍼에 재료를 야무지게 올려 10개 이상 먹으니 '잘 먹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다음 날 아침에는 같은 재료를 다른 방식으로 먹어보고 싶었다. 생각난 메뉴는 포케! 마침 정월대보름이라 한 짭짤한 오곡밥에 월남쌈 재료들을 올리고 샐러드드레싱을 뿌렸더니 웬걸, 웬만한 포케 맛집보다 더 맛있었다. 결국 그날 내내 포케로만 식사했다. 다음번 식사에는 옥수수와 다시마를 넣고 칠리소스에 비벼 먹었더니 완전 내 취향. 이대로 한 달도 먹을 수 있겠다 싶었다. 놀라운 건 딱 하루 클린식을 했는데 다음날 일어나는 몸이 상당히 가뿐했고 먹는 양이 늘었음에도 체중이 줄었다. 피부는 매끈하고 속은 편안하니 더 먹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사실 채식 식단에 더 진심이 된 건 월남쌈으로 식사하기 직전 보게 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때문이다. 제목은 '음식이 나를 만든다:쌍둥이 실험'.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스물한 쌍의 일란성쌍둥이들을 대상으로 8주간 식단에 변화를 주면 어떤 신체적 변화가 있는지를 추적한다. 일란성쌍둥이는 유전자 배열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훌륭한 비교군이 된다. 한 명은 채식, 한 명은 일반인의 식단과 유사한 잡식성 식단을 섭취하고 운동과 생활을 비슷하게 유지하여 추후 결과를 비교하는 식이다. 8주 후 측정했을 때 채식 식단을 섭취한 사람의 신체 나이, 장내 유익균의 분포도 등이 모두 월등히 좋은 결과를 보였다. 꽤 짧은 시간 동안 식단을 바꿨을 뿐인데 변화는 상당히 드라마틱한 수준이다.
신체 능력 향상도 좋지만 내가 주목한 건 다른 내용이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우리가 섭취하는 육류가 어디에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그 폐해는 무엇인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다큐를 통해 왜 소고기 섭취가 아마존 열대우림을 파괴하게 되는지, 돼지를 키우는 농가에서 어떤 식으로 이웃에게 바이러스를 옮기는지 등을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이어진 정부와 기업들의 육류 소비 권장 행태를 비판하고, 육류가 우리 몸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도 이야기한다. 다행스러운 건 사실 고발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판과 동시에 대안을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비춰준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건 유제품의 소비를 줄이기 위해 캐슈넛으로 치즈를 만드는 일본 사업가의 이야기였는데, 애초에 인간의 몸은 유제품이 필요한 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외에도 미슐랭 3스타, 세계 최고 레스토랑 수상의 영예를 거머쥐었지만 채식 레스토랑을 오픈하게 된 셰프의 이야기, 공장형 양계업을 하다 기존 시설을 재활용해 버섯 재배를 시작한 농부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결론은 기업은 소비자가 원할만한, 정말 맛있고 퀄리티 있는 채식 재료와 요리를 선보여야 하며 소비자 역시 불필요한 경계심을 없앨 필요가 있다는 걸로 맺어진다.
육류(생선, 유제품, 달걀 등을 포함)를 소비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는 오래전부터 자문해 왔지만 쉬이 확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생활 전반에서 섭취하는 거의 모든 음식들이 많든 적든 육류와 관련되어 있고(과자도 유제품 혹은 육류 시즈닝이 안 들어간 비건 제품을 찾기 어렵다) 특히 빵, 피자를 좋아하는 나에겐 참으로 쉽지 않은 옵션처럼 보였다. 하지만 채식주의자들이 이야기하듯 '적어도' 채식하는 횟수를 늘린다면 자체로 의미가 있고, 아직 시도해 보지 않은 채식의 가능성도 무한하니 새로이 도전해 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찾아보면 대체품은 다 있으니. 내가 지양하는 건 '어떻게 그게 가능해?' 혹은 '그래도 난 고기가 너무 좋아, 어쩔 수 없어'하는 마인드다. 수십 년간 이어온 식습관을 그리 쉽게 바꿀 수 있겠냐만 시도하는 입장에서 '어쩔 수 없다'는 마인드보단 '그래도 이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인드가 더 멋지고 쿨해 보인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미국마트의 선반에는 채식 제품들이 꽤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데 우리나라는 이제 '식물성 식단' 관련 제품이 몇 가지 나오는 게 전부다. 고기 소비량이 세계 웬만한 국가들을 제치고, 한국 사람들처럼 먹어대면 앞으로 지구가 몇 개는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나라에서 채식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시도는 해볼 수 있겠지. 몇 번 실패를 겪더라도 행동하지 않는 것보다 '적어도'의 마음으로 해보는 게 나름의 의미가 있을 테다. 월남쌈과 포케처럼 채식 자체로 맛, 영양 등에서 모두 만족할 만한 식단을 꾸준히 찾아보는 과정도 또 다른 재미가 되겠지. 오늘은 무얼 먹어볼까나!
*해당 글은 이전에 발행했던 글을 연재물에 맞춰 재편집하여 발행한 글입니다! 앞으로의 시리즈도 많관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