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애마와 지금은 무엇이 다를까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내게 애마부인은 익숙한 작품이 아니다. 영화 소개 기사나 옛날 TV 프로그램에서 성적인 뉘앙스를 담은, 입 밖으로 내면 안 되지만 모두가 은근히 논하길 즐거워하는 대표작으로 그 안에 담긴 함의를 지레짐작했을 뿐이다. 그러던 중 넷플릭스에서 애마부인을 모티브로 한 '애마'가 공개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짧다면 짧고 요즘 시대에 길다면 긴, 6부작의 첫 화를 재생하며 내가 궁금했던 건 애마부인을 어떻게 그려내는가가 아닌, 코믹과 스릴러를 넘나드는 히로인 드라마를 연이어 선택하며 자신만의 장르를 개척하고 있는 이하늬가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지, 그녀가 왜 이 작품을 선택했는지였다.
앞서 말한 대로 애마는 애마부인을 소재로 한 작품이고, 애마부인을 촬영하고 개봉하기까지 제작사와 감독, 연기자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비하인드를 골자로 스토리가 이어진다. '영화는 무조건 꼴려야 한다'는 신조 혹은 신앙을 갖고 있는 소속사 사장 구중호와 그의 제작사에 소속된 톱스타 정희란, 영화 '애마'를 통해 성공한 연기자로서 데뷔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신주애, 애마의 감독이자 작품을 둘러싼 이해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곽인우가 주요 인물이다. 여기에서 이하늬는 에로 배우로 성공했지만 진정한 연기를 갈망하고 누군가의 이해에 끌려가기보다는 자신의 철학을 지키고자 하는 톱스타 정희란을 연기했다. 그녀는 모두가 요구하는 여배우의 단순함, 반짝이는 걸 좇는 비정하리만큼 단순한 욕구에 머무르길 원하지 않는다. 풍성한 헤어스타일, 레이스와 당시에 한창 유행하던 벌룬핏의 셔링 드레스, 주먹만 한 악세사리로 치장한 정희란은 톱스타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습관처럼 손가락에 꽂은 연초들은 톱스타의 위치에서도 어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와 답답함을 담은 것처럼 불을 빛내며 타들어간다. 진짜 타들어간 건 썩어 들어가는 그녀의 마음과 존엄성 아니었을까.
에로 영화만을 고집하는 구중호와의 대립 이외에 드라마 초반엔 희란과 주애의 갈등이 자주 등장한다. 자칫하면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는 톱스타와 신선한 페이스와 육감적인 몸매로 대중을 사로잡을 신인의 자리싸움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처음 희란과 주애가 마주쳤을 때 희란은 그녀의 합격을 성상납을 통해 얻은 리워드처럼 취급하지만 주애는 성상납을 '당해야 하는' 인물에서 '내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물로서 본인을 탈피시킨다. 에로 영화 출연을 강요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성공의 주연이 아닌 누군가의 트로피로서 소비당하고, 정부 고위간부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살 수 있는 여자'로 취급당했던 희란 입장에서는 주애의 이런 모습이 다르게 느껴진다. 둘은 수없이 많은 장면에서 서로를 썅년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 둘은 모두 알고 있다. 이 세계에서 썅년이 '되지 않는 걸 선택'하면, 바로 싸구려, 쉬운 여자, 어디서나 '애마'로 부르며 욕정의 대상 혹은 그 이하로 취급당할 게 뻔하다는 걸.
이해영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애마를 작업한 의도가 어느 정도 보인다. "80년대, 세상의 부조리함 안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는 말만 들으면 지금과 뭐가 다른가 싶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여전히 부조리한 면이 있기 때문에 2025년의 시청자에게도 가닿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납득이 간다. 솔직히 애마를 보는 내내 사용된 은근한 메타포로는 충족되지 않는 불만과 분노가 있었다. 주애가 영화보다 자기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긴 것, 자신의 과거를 잡고 지독하리만큼 불쾌하게 치근덕거리는 스포츠 부장기자의 성기를 걷어찬 것. 청룡영화제에서 희란이 성상납을 폭로한 후 공안부에게 잡히게 되자 주애가 말을 타고 와 희란을 구하는 장면은 애마부인이 아닌 '백마 탄 왕자'를 주애에 대입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연예계에 직접적으로 발을 들이고 있지 않은 나조차 아는 현재의 사실들이 있다. 연예인 지망생들이 (자신의 말로는) 연예계에서 한가닥 한다는 사람들에 의해 성상납 혹은 성범죄를 당한다. 연예계가 배우나 가수 외에 인플루언서의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이젠 일반인들도 유명해지기 위해 벗는 일이 허다하다. 음악성보다 한 번의 노출이 더 화제가 된 아이돌에게 연이어 CF계약이 들어가며, 이런 계약을 결정짓는 건 대체로 기업의 고위 간부, 즉 남성들이다. 아니, 그리 멀리 갈 것도 없다. 포털 사이트에 애마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상위에 노출되는 키워드가 '애마 노출', '애마 수위'인 것만 봐도 그때 영화관 유리창을 깨고 여배우 노출을 보겠다고 열광한 사람들과 뭐가 달라졌을까 싶다.
최근 읽고 있는 책 중에 캐롤라인 냅이 쓴 '욕구들'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80년대, 미국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며 여성의 인권, 참정권, 경제권이 확대되던 시기를 회고한다. 작가가 말했듯 그 시절의 변화는 대단했고, 그 시대의 여성은 70년대까지 여자들이 결코 상상도 못 했던 수많은 자유와 권리를 처음으로 획득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직 제거되지 않은 전통적인 여성상에 대한 요구, 백래시로 일어난 여성들의 마른 몸에 대한 강요와 기본적인 욕구를 튀어나오지 못하게 막으려는 암묵적인 메시지 등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걸 생각하면 여성들의 삶이 정말로 더 좋아졌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애마 역시 비슷하다. 애마부인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다 보니 해당 작품을 통해 여성의 성욕을 처음으로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에, 여성의 지위가 한층 올라갔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쓰여있었다. 정말 그럴까. 여성의 자립, 욕구, 욕망을 남성의 관점에서 남성의 시각으로 담아 남성의 언어로 남성이 원하는 목소리대로 뱉는 것이 정말 여성의 지위를 올려주는 일이었을까. 2025년에 애마를 감상한 나의 의견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2025의 애마와 여성들 역시, 아직도 한참은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