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글 세계 안에서 무한히 나는 법
혼자 끄적이다 누가 볼세라 후다닥 숨기는 그런 글 말고, 홀로 감탄하든 괴리감에 몸부림치든 아무도 공들여 보진 않지만 그렇다고 숨겨지지도 않는 애매한 경계에서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은 시점이 언제더라. 어쩌면 대학생 때일 수도 있고, 회사를 관두고 '글쓰기'를 업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던 시점이었던 것 같기도. 대학생 시절과 현재를 비교했을 때 다른 점이 있다면 보다 어린 날의 나는 '글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고지식하게 박혀있었던 반면 지금의 나는 유명 작가가 몇 년을 밤낮 지새며 한 땀 한 땀 새기듯 쓴 문장도, 트위터리안이 근무 중 잠깐 들른 화장실 변기 위에서 날리듯 쓴 문장도 다 글이라고, 내게 무언가 가르침을 줄만한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진득이 문장들을 들여다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문장의 질, 담겨있는 생각의 깊이, 하물며 그 문장을 글자로 구체화해 세상 밖에 내어놓은 사람의 일면까지 따지자면 생각할 거리도 무한하겠으나 지금의 생각은 그저 글이면, 일단 세상으로 나오기로 마음먹어진 글이라면 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겠거니 한다.
유연해졌다 싶을 수도, 글 역시 가벼운 콘텐츠가 아니면 소비되지 않는 시류에 굴복해서 일수도 싶은 이런 마음은 타인의 글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뿐 아니라 창작자로서 내가 글을 쓸 때의 마음가짐까지 바꾸어놓았다. 블로그 포스팅? 일단 해. 티스토리? 해볼 수 있지. SNS 콘텐츠? 만들어보지 뭐. 브런치? 글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면 다 한다며? 종국에는 오로지 소비자와 독자 관점에서 오락을 위해 즐겼던 팬픽까지 손을 대봤다. 언젠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캐릭터 창작과 픽션의 문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핑계를 대며. 그렇게 하다 보니 글을 쓰는 게 더 즐거워졌다. 부담은 줄었다. 질리지도 않았다. 블로그 포스팅을 하다 지겨우면 브런치에 사적인 농담이나 에세이 비스므리한 걸 쓰면 되고, SNS 콘텐츠의 '성공하는 법칙'에 질리면 그저 내가 사랑하는 인물이면 되는 팬픽 속에 환상을 담아 실어 나르기만 하면 됐으니. 그 어떤 곳에서도 '눈에 꼽을만한 성공'이란 걸 하진 않았지만 내가 만든 글 세계 속 각자 다른 매력의 행성들을 오고 가며 유일한 항해자이자 탐험가인 나는 행복하고 즐거웠다. 하나의 뾰족함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일을 하면서도 항상 염원했던 '스페셜리스트'로서는 영 가망이 없었을지 모른다. 뭘 잘한다고 설명할 수 없는 애매한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정체성만 더 확인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애매함과 정해지지 않은 뭉툭한 화자로서의 내가 글 세계 속에서는 오히려 글을 잡고 놓지 않을 수 있는 악력이자 완력이 되었다.
들어갈 수 있는 허들이 낮아졌으니 글을 더 자주, 많이 쓰게 되었다는 점 역시 좋았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나서는 하루에 한편씩 글을 썼다. 그날 아침에 떠오르는 단상을 구리든 허접하든 뻔하든 글이라는 형태로 얼기설기 엮어 슬그머니 공개하기를 눌렀다. 어쩔 땐 작정하고 이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고 몇 시간 동안 공들여 쓰기도 했다. 그것 역시 공개하기를 누르며 다른 글과 같은 페이지에 담겨 사람들을 향해 손짓했다. 여기 있어요, 세상엔 저 같은 글도 있답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도, 공개됐다고 말하기 의심스러울 만큼 무반응이라도 내겐 다 같았다. 때로는 글을 쓰지 않고는 못 견딜 만큼 얘기하고 싶은 것들도 있었으니. 글이란 형태로 공명하되 그 울림은 어쩐지 내 것만이 되는 기분이었지만 어때. 쌓인 글들을 각기 필요한 곳에, 더 잘 보이고 잘 읽어줄 만한 곳에 밀어 넣는 지금,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을 때 하자'는 그간의 결심이 헛되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최근 SNS에서 '소매넣기'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소매치기의 반의어로, 남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빼가는 게 아닌 도리어 무언가를 넣어주는 걸 지칭한단다. 칭찬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용돈 소매넣기 해주고 싶다'는 식으로 쓰이나 보다. 생각해 보니 나는 내 글을 사람들에게 꾸준히 소매넣기 해왔다. 플랫폼이 뭐든, 주제가 뭐였든, 거기 등장하는 생각과 문장들이 뭐든 어디에서나 이것 좀 한번 읽어봐, 이런 생각 나만 하나? 하며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들 주머니의 빈틈을 노려 샥샥 꽂아두려 눈에 불을 켜고 희번덕거렸다. 교회에서 증정하는 판촉용 물티슈처럼 무신경하지만 자연스레 받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타깃을 잘못 찾은 헬스장 전단지처럼 건네자마자 버림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비대면으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글을 살포하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차가운 냉혈한의 무시라도 눈에 직접 보이지 않으니. 설사 찢어버린다 해도 어쩌겠냐 싶지만 일단 읽고 나서는 언제든 내 문장이 불시에 생각날걸? 싶기도. 이 글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마냥 공감에 기대긴 힘든, 공감에 후킹에 재미 요소까지 담아야 하는 요즘 글들 사이에서 이 글을 누군가의 주머니에 소매넣기한다면 구겨진 카페 휴지처럼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게 세탁기에 들어가기 전까지 남아있을지, 거추장스럽다고 당장 지하철 쓰레기통에 떨어질지 모르겠다. 그래도 쓰는 거다. 이 행성이 아니면 저 행성으로 가면 되니까, 거기에서 또 새로운 사람들에게 여기 있어요, 한번 읽어보실래요? 권하면 되니까. 이 글 세계 안에서 무한히 날아오를 부력을 이미 갖게 되었으니까. 동동- 뜬 채로 권하더라도 무서워 말아요. 험한 건 아니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