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령 작가님이 말씀하신 두 작품은 무엇이었을까?
부희령 작가님을 뵙게 된 건 경기히든작가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한국어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미처 여물지 않았을 때라, 세계 고전 문학만 편협하게 읽어대던 내겐 그 만남 전까지 부희령 작가님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멘토링 기간에도 우리는 나의 원고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작가님의 작품에 관해 언급할 기회가 없었다. 멘토링이 끝나고 작가님과 단둘이 만났을 때, 나는 직전의 짧은 만남을 활용해 신춘문예에 응모를 할까 말까 망설였던 작품 초안을 전달드린 후였다. 작가님은 소설을 쓰기 위해 내가 감안해야 할 상황을, 준비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셨다. '소설에 쓰는 문장을 배우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이야기 끝에 작가님의 신간 소식을 들었고 꼭 선물을 해달라 요청했다. 뻔뻔했지만 결코 나만 소중히 여긴 인연이 아님을 확인받고 싶은, 유치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일'이 내 손에 들어왔다.
처음에 제목을 듣고 나서는 로맨스 소설인가? 하고 생각했으나 그건 내가 작가님을 잘 몰라서 한 추측이었다. 책은 7개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고, 특이하게도 제목으로 사용된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일'이 맨 처음에 등장한다. 스토리 역시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희령 작가님의 스토리는 대체로 처음에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둘의 대화 속은 회상 사이에 중심인물이 한 명 추가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심인물은 나머지 두 명의 일상 혹은 생각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치며 예측할 수 없는 전개와 결말로 인물을 이끌어놓는다. 상황에 대한 건조하지만 적확한 묘사, 그 안에서 인물로 형성되는 낯설고 미묘한 분위기는 지금 이 계절, 날씨와 매우 잘 들어맞았다. 소설을 읽고 있자면 한겨울 척척한 안개가 낀 터널 앞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한없이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언제 올지, 날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그런 버스를.
인연을 맺은 지인으로서 혜택처럼 들은 비하인드 스토리에서, 작가님은 이 책에 수록된 두 개의 스토리가 본인이 생각해도 흡족하게 나온 결과물이라 말씀하셨다. 독자의 기준과 창작자의 기준은 대체로 다르기 마련이라 그 두 개가 어떤 것일지 잘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을 꼽아보라면 '봄잠'과 '마중'을 꼽겠다. '봄잠'은 추측하기로 제주 4.3 사건을 담은 듯한데, 분량이 짧지만 그 시절 인물이 겪었을 공포와 혼란, 시간이 지나며 애써 지우려 노력했으나 지우지 못한 흔적들이 여러 감각으로 침투하여 아릿한 공감을 준다. 특히 아래 문장이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할망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동굴에 들어가기 전의 세상을 이해하려 했어요. 낮이 되면 해가 둘 떠올라 죄 없는 이들을 불에 태워 죽이고, 밤이 되면 달이 두개 떠서 죄 없는 이들을 추위에 얼려 죽였던 거구나. 푸른 옷을 입은 거친 사내들이 나타나 함부로 총을 쏘고 죽창을 휘둘렀던 거구나. 그래서 몸을 움직여 찡그리고 한숨짓고 눈물 흘리며 비명 지르던 이들은 귀신으로 만들고, 털어서 먼지 나지 않고 얼룩과 냄새가 없으며 눈감고 귀 막은 이들은 풀과 나무, 짐승과 새로 만들었던 거구나." - '봄잠'에서
'마중'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그를 돌보는 딸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나 쌓이긴커녕 유실되고 마는 기억 속에 아버지는 혼란을 느끼고, 딸은 젊은 시절 가족에게 다정하지 않았던 그를 떠올리며 차라리 미워할 수만 있기를 바란다. 여기에서도 최애 문장을 꼽아보자면 아래와 같다.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양경은 우두커니 앉아서 노인의 광기와 어린아이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빗방울이 나뭇잎에 부딪히는 낮고 부드러운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었다.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한참 그렇게 앉아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양경은 아이가 되어버린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가기 싫었고, 그 집에 갇혀 아이처럼 여전히 부모 탓을 하는 자기 자신도 싫었다. 빗속에 앉아 몸이 젖기를 기다렸다. 녹지 않으려 애쓰던 마음이 빗물에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 '마중'에서
편의상 꼽으려고 해서 꼽은 것일 뿐, 사실 이 책에 담긴 소설들은 한번 읽고 흘려보낼 이야기들은 아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무언갈 욕심내본 이들이라면 감정이입이 될 '출간기념 파티', 주인공의 결정을 응원하지만 한편으론 착잡한 마음에 페이지를 쓸어내리게 되는 '찬투'도 매력적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희령 작가님을 알고 지내며 '작가님 되게 T형 인간이시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T형 인간이 건조히 담아낸 고유의 정서는 F형 인간이 과잉으로 흘려낸 감정보다 깊은 스킨십을 준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옛 연인을 만나러 가는 일'은 예상처럼 로맨스는 아니나, 그보다 중후한 감정의 결을 담아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희령 작가님을 알고 느꼈던 그 순간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