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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Nov 03. 2023

글이 좋다.

삶의 지표를 찾지 못해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세상엔 너무나 많은 볼 것들이 있고 읽을 것들이 있고 느낄 것들이 있고 말할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에 난 자주 휩쓸리고 길을 잃고 원점으로 돌아오고 고꾸라지고 정신이 혼곤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명하게 알 수 있는 건 ‘여기에 내가 원하는 것은 없다’라는 것.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언가를 이야기 해 볼 때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찾고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들이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입 밖에 꺼내 놓거나 여기에 써 내려갈 순 없지만 대체로 그것들은 다이어리를 펼칠 때, 일기를 끼적일 때, 책을 읽을 때 나에게 다가온다. 어쩌면 그것은 헛짓거리를 하지 않고 무어라도 생산적인 걸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일까. 단지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 사실 다이어리를 펼치고 일기를 쓰고 책을 읽는 것 또한 내가 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가를 알기 위한 수단일진대 왠지 그때는 그 답을 찾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찾는다고 생각한 건 그냥 그런 궁금증이었을까. 모르겠다, 정말 찾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도 추측을 해보자면 그것은 어떤 삶의 부표나 지표라고 할 수 있을까.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부표는 위치를 알려주는 표식이 되는 것이고 지표는 기준점 같은 것일텐데.(네이버 사전을 보니 부표는 ‘물 위에 띄워 어떤 표적으로 삼는 물건’이라고 하고, 지표는 ‘방향이나 목적, 기준 따위를 나타내는 표지’라고 하니 대체로 내가 내린 정의와 부합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달리기에서 결승점을 표시하는 것은 부표이지만 달린 속도가 우승의 지표가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부표와 지표는 엄청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우리는 수많은 부표를 지나 지표에 다다르는 것이겠구나. 그렇다면 내가 인터넷 상에서 찾고자한 부표와 지표는 무엇일까. 부표는 사회 속 내 상대적인 위치, 즉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대중적으로 얼마나 ‘괜찮은지’ 혹은 ‘괜찮은 성과를 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겠고 그것은 여러 채널들의 방문자 수 등으로 갈음될 수 있겠다. 다른 유명 블로거, 유튜버랑 대비했을 때 내 콘텐츠가 얼마나 대중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겠지. 지표는 무엇일까. 내가 바라는 삶의 기준은 그 안에 있을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릴 없이 화면 위 손을 더듬으며 이것저것 누르고 빠르게 지나가는 화면들을 응시하지만 한번도 그 안에서 지표를 찾은 적은 없는 것 같다. 만일 내가 찾았다면, 운이 나쁘게도 그 안에서 지표를 찾았다면 나는 다이어리와 일기와 책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다. 아직까지 나는 내 삶의 기준을 그 안에 내맡길 정도로 유약하고 얇은 존재는 아니었구나. 삶의 구체성을 평평한 화면 안에 붙이려 하지 않았구나.


모두가 이야기하느라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글자로 적어내리는 건 참 효율성이 떨어지는 방법이다. 그냥 말로만 뱉으면 되는데 타자를 치든 손으로 적어내리든 쓰고, 읽어보고, 다시 고치고 하는 일을 한다는 건 요즘 시류로 봤을 때 시간이나 에너지가 과하게 많이 드는 작업이라는 말이다. 어째서 그런 일을, 그런 방법을 고집하고 싶어할까. 그게 나에게 잘 맞기도 하고(섣불리 무언가를 ‘사실’이나 ‘의견’으로 만들기 싫어하는 나에겐 글이 제일 적합하겠지) 그게 맞다고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맞다’는 ‘옳다’보다는 강경함이 떨어지지만 어떤 도덕적, 윤리적 함의를 곁들이고 있는 느낌이다. 글은 말보다, 영상보다 밋밋할 수 있고 자칫 잘못하면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화자나 청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신중하다. 힘이 있다. 곧다. 무게가 있다. 솔직하다. 그래서 글이 좋다. 본인도 모르게 글에 눅진하게 배어있는 그의 습관이, 어투가, 관점이, 성향이, 선입견과 편견이 언뜻언뜻 눈으로, 손으로, 목으로 넘어오는 게 몸을 빠듯하게 채워주는 느낌이다. 정말 좋은 글을 읽었을 때 몸이 그의 표현과 문장으로 묵직하게 차오르는 게 엄청난 포만감과 양적 충만을 준다.


아직도 내가 찾으려는 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찾아야할지는 잘 안다. 마치 지도도 없이 본능적으로 ‘저기에 금광이 있다’ 알 수 있는 것처럼. 이것은 어찌보면 직관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방법을 알고 있어서 다행이다. 그것들은 많지 않아도, 시끄럽지 않아도 나 하나를 채워주기엔 충분히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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