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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Jan 01. 2024

막연해서 오히려 좋은 삶

예측할 수 없는 거친 파도라도 GO with the FLOW!

막연한 것은 불안하다. 막연한 것은 답답하다. 막연한 것은 헷갈린다. 막연한 것은 계획을 세울 수 없게 한다. 막연한 것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MBTI J형 중 한 명으로 '막연한 것'의 단점은 줄줄이 읊을 수 있다. 무엇이든 데이터로 치환되어 원인과 결과로 도출할 수 있는 시대 역시 막연한 것을 정량데이터로 가공하기 조금 까다로운 로우 데이터로 볼뿐 '막연한 것' 자체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먹어보지 않은 과일의 당도도 1부터 5 사이의 정도로 분류되어 가격이 판가름 나고 직업 역시 현직자의 생생한 경험담으로 대리 체험할 수 있는 시대에 막연한 건 없다. 그저 더 구체적이고 덜 구체적인 게 있을 뿐. 현대인들은 약간 번진 경계라도 선명히 하고자 시간을 들여 검색을 하고 발품을 팔아 실체를 확인한다. 이 세계에선 막연한 것도 막연하게 남아있을 수 없다.


아마 이건 인간의 생존 본능에 따른 신체 기제일 것이다. 인간은 막연한 것에는 불안을 느끼고 실체를 확인하면 공포를 느낀다고 하는데, 체감상 공포를 견디는 것보다 불안을 견디는 걸 힘들어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대상이 무엇인지라도 알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것인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려해 볼 수라도 있을 텐데 실체가 없는 불안은 실존적 위기와 근원적 존재의 회의를 겪게 한다. 그러니 세계를 탈탈 털어서라도 이게 뭔지 확인하고 싶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 역시 손으로 들쑤시며 어서 선명해지라 채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력은 한계가 있는 법. 그 누구도 미래에 무엇이 다가올지는 모른다. '예보'라고 하는 건 지금까지 존재했던 수많은(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딥한) 데이터를 근거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만, 그리고 그 데이터의 양은 날이 갈수록 많아진다만 갈수록 미래를 예측하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기상 예보가 그러하고 경제 예보가 그러하다. 예보는 참고서로는 적합하지만 미래의 장면을 고스란히 가져와 미리 체험시켜 주는 SF영화 속 근사한 장치는 아니다. 막연함을 구체화하기 위한 시도는 100%의 성공률로 치환되지 않는다.


막연함을 즐길 수는 있을까. 불안과 불확실성의 파도를 타고 부드럽게 유영할 수 있을까. 하지만 파도는 애초에 동동 떠서 여유를 즐기라고 있는 존재는 아니다. 파도는 거칠고 기세가 확실하다. 우리가 시도하는 파도 속의 수영은 바캉스 광고 영상에서 보는 것처럼 유유자적하고 편한 것은 못될 테다. 코로 짠 물도 한 움큼 들어오고 더러운 흙탕물이 입으로 들어와 구역질이 절로 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짠 물이 들어오니 이게 진짜 바다인 걸 알 수 있고, 더러운 흙탕물로 내가 뭍에 가까워진 걸 알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경험자체로 의미가 있고, 그 과정에서 손실을 겪지 않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은 때론 편협하고 오만하다.


새해를 시작하며 다짐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는 '흐름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될 수도, 흐름에 타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와중에 모든 것들을 너무 확실히 하려 애쓰지는 말자'는 것이다. 작년 몇 개월 동안 스스로 단련한 덕에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꾸준히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안다. 그에 작게 더할 수 있는 거 계획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라 여기지 말고, 계획과 막연함 그 사이에서 자유롭게 놀자는 것이다. 올 한 해가 마무리될 때도 목표한 바와 전혀 다른 생경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이젠 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 과정에 의미가 없으랴. 파도에 몸을 싣고 이제 GO with the FLOW!


아름다운 물결이든, 거친 파도든 암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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