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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Feb 06. 2024

우리가 사는 곳이 환상의 나라는 아니지만

현실? 그런 거 난 몰라.

며칠 전 지인과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만났다. '영화관 메이트'인 우리는 관심 가는 영화가 생기면 매번 같이 영화관에 가서 관람을 하고 몇 시간 동안 후기가 섞인 잡담을 하다 집에 오는 게 루틴인데, 이번에 영화관에서 꼭 보자고 의기투합한 영화는 바로 웡카였다. 사실 나는 찰리와 초콜릿공장의 세계관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티모시 샬라메의 팬으로서 '우리 티미'가 처음으로 도전하는 뮤지컬 영화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영화인 '패딩턴'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고 해서 이건 봐야겠다! 싶었지요.


오랜만에 좋아하는 팝콘 한통을 품에 안고 본 웡카는 괜찮았다. 괜찮았다는 건 다른 사람한테 이건 꼭 보라며 쫓아다니며 추천할 정도는 아니지만 '내가 대체 뭘 본거야?'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는 아니란 얘기다. 그저 딱 예상한 만큼의 스토리와 음악과 비주얼이었다. 사실 찰리와 초콜릿공장의 프리퀄이라고 하기엔 뒤에 나오는 시리즈와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지진 않지만(대체 그 사이에 웡카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사람이 그렇게 되나..) 꿈과 희망이 많은 어릴 적 웡카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잘 그려냈다 싶었다.


중간에 당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조니뎁 웡카가 나온 건지...


문제는 영화관에서 나온 직후였는데, 알록달록한 색과 솜사탕 구름을 타고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 세계로 갑자기 떨어지니 알딸딸한 술이 확 깬 것처럼 영 정신을 차릴 수가 없고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분명 머나먼 미지의 세계 속 초콜릿 강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이 인파와 미세먼지가 낀 부연 하늘과 코를 찌르는 음식 냄새는 다 뭐야. 제 초콜릿 다시 돌려줘요.


영화를 보기 전 커뮤니티에 올라온 발 빠른 이들의 후기에는 '현실적인 사람들은 보고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라고 쓰여있었다. 어찌 보면 맞는 얘기다. 현실은 이렇게나 칙칙하고 사람들은 무표정인채 사랑을 꿈꾸지 않으며, 선의에 기대 꿈을 펼치는 사람들은 '민폐갑' 취급을 받는다. 같은 처지에 있어도 서로 갑이 되기 위해 그 안에서 서열 다툼을 하며 으르렁거리는 사람들에게 천둥과 소용돌이가 섞인 초콜릿을 먹으면 좋은 생각이 난다고? 차라리 사파리의 사자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 나타나 출근길이 늦어졌다고 하는 게 훨씬 현실성 있다.


하지만 그렇게 '현실'만이 중요하다면, 그게 세계를 바라보는 전부라면 영화가 아닌 뉴스 기사만 보라며 우린 일갈했다. 영화는 현실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꿈을 꿀 수 있는 운동장이기도 한데, '현실이 아니니 재미가 떨어진다'는 건 뭐람. '아이들 영화'라고 단정 짓는 결론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성인들 역시 웡카처럼 일견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사랑의 힘을 믿고,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힘이 될 수 있는 이야기인데. 실제 엄마와 웡카의 서사에 눈물짓는 내 옆에는 '대체 언제 끝나냐'고 칭얼대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피비린내가 자욱하고 누군가는 때려눕혀야 '사이다 전개'라 칭송받는 이 시대에 웡카가 얘기하는 달콤함은 어린애 장난처럼 보인다. 꿈을 꾸고, 잘 몰랐던 이들의 연대와 사랑으로 꿈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은 어쩌면 판타지 중의 판타지겠지. 세상은 뮤지컬 영화처럼 넘버 하나가 끝나면 갈등과 어려움이 다 해결되는 곳도 아니지만... 그래도, 영화관에서 나오자마자 풍선껌 터지듯 증발하는 환상에 비릿한 슬픔마저 느껴져도 나는 이 꿈을 지속하고 싶다. 세상이 내게 건네는 맛이 처음엔 달고 끝은 쓰더라도 '세상은 초콜릿 같아'라는 생각만으로도 하루하루를 좀 더 몽글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초콜릿 나무와 꽃이 핀 동산이 아니라도 뭐 어때. 꿈꾸는 자에겐 마다가스카르의 사자에게서 담아 온 용기와 태평양 돌고래에서 얻어온 명랑함이 있는걸요. 이제 꿈과 희망의 나라로 갈 시간입니다, 오늘 하루도 달콤하게!


tip. 영화 중간에 초콜릿 먹고 싶어지는 장면들이 있다 해서 초콜릿을 사갔는데, 초콜릿보다는 프랄린 초콜릿이 어울릴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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