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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담 Nov 22. 2021

서울 원룸 오피스텔의 현실 그리고 지금

짧았던 20대의 기억

아주 우연히 유튜브에서 리플 채널을 알게 되었다. 이제 공식적으로 나이에 4-자를 붙이게 된 애 둘 엄마인 나와는 타겟층이 완전 유튜브 채널이었다. 출연진도 채널의 PD도 스물다섯여섯 나이였다. 분명 컨셉을 잡고 대본을 가지고 촬영했을 텐데도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묘한 성격의 채널이었다. 마치 오래전 예능 시트콤을 보는 듯 하달까- 특정 주제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 또래에서 궁금해할 만한 모든 것을 다양한 영상으로 올리는 채널이라는 점도 신선했다. 아마 내가 신사임당, 김작가TV, 삼프로- 이런 경제 채널 위주로 구독하기에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중 출연진의 집에 방문해서 집을 둘러보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시리즈가 있었다. 서울 20대 원룸 오피스텔 현실- 이런 제목의 영상들이었는데, 그 영상 두어 개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요 근래 내가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던 원룸의 모습은 오늘의 집, 에어비앤비 에 올라올 법한 그런 예쁜 모습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오피스텔 원룸에 커다란 유리창이 있고 스탠드와 하얀 러그, 꼬마전구 조명으로 꾸며진 그런 예쁜 집. 창가에는 찰랑이는 차르르 하얀 커텐이 꼭 걸려 있어야 했다. 테이블 야자나 몬스테라 화분 하나가 빠지지 않고 작은 우드스툴 위에 놓여있는 그런 집이었다. 영상이 내 마음에 계속 머문 것은 당연히 그런 예쁜 원룸 인테리어는 아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옷이 가득 걸려있는 2단 행거, 인테리어를 고려하지 않고 산 것 같은 컴퓨터 책상. 비좁은 신발장과 부족한 수납공간. 갈 곳 없는 짐들이 곳곳에 널려있고 그 와중에 한 구석에는 빨래 건조대에 옷가지가 걸려 있었음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지사. 원룸이나 오피스텔에는 베란다가 따로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영상 속 방의 월세는 60에서 70 혹은 그 이상이었고 그것이 서울의 현실이었다. 스물다섯 여섯.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서울에 와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직장 근처에 출퇴근을 위한 방 한 칸을 구했을 때가 스물다섯이었다. 영상 속에 보이는 것보다 더 작은 방 한 칸이었고 그 방 한 칸을 구하는 데에도 보증금을 모으기 위해 일 년이 걸렸다.


처음 방을 구하던 때가 떠오른다. 지방에 있던 부모님과 달리 서울에 계시던 큰아버지와 방을 구할 근처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항상 우리보다 가진 것이 더 많았고 돈과 부동산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던 큰아버지. 내가 초등학교 때 부모님은 사주지 않은 비싼 업라이트 피아노를 내게 선물해주었던 분, 명절에 갈 때면 지금 생각해도 큰돈인 10만원씩을 매번 용돈으로 주셨던 큰아버지였다. 내가 중학생일 때 친구들은 작게는 5천원부터 많아야 만원 이만원의 세뱃돈을 친척들에게 받는다고 말했으니 꽤 큰돈이었다. 그러한 큰아버지가 먼저 부동산에 알아보고 보여준 집을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보인 채 계약하지 않았다. 담벼락도 없었고 한번 거쳐갈 현관도 복도도 따로 없이, 차가 다니는 길에서 문을 열면 바로 방이 있었던, 낡은 다세대 주택의 1층 허름한 방이었다. 월세가 15만원으로 이보다 가격이 싸면서 괜찮은 집은 없다고 하신 기억이 난다. 월세를 아끼고 빨리 돈을 더 모으라는 의미였음을 알면서도 나는 그 상황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한 집을 내게 보여준 큰아버지가 조금은 밉기도 했던 것 같다.


나는 가진 돈이 없었고, 내가 돈이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 방이 창피했고 수치스러웠다. 돈은 없었지만 나는 대기업에 막 입사한 후였다. 월세가 아깝기는 해도 30만원까지는 낼 자신이 있었다. 다른 날에 다시 부동산에 혼자 찾아갔다. 조금 더 깨끗한, 현관을 거쳐 계단으로 올라가는 원룸을 계약했다.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가 28만 원. 관리비는 별도였다. 방이 5평도 안될 만큼 작았지만 그 정도면 지하철 역에서 가까운 것 치고 무척 싼 가격이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결혼을 하고도 나는 한동안 거주하는 공간에 대해 결핍을 가지고 있었고 얼마 전 까지도 더 나은 거주 공간에 대한 욕망으로 욕심을 계속 부리고 있었다.


서른 중반 내가 20대에 살아보지 못했던 깨끗한 역세권 풀옵션의 신축 오피스텔의 월세를 받기 시작했다. 물론 개인 소유는 아니고 부부가 함께 쌓아온 결과물이다. 정작 나는 비싸서 살아보지 못했던 브랜드 오피스텔을 소유하는 것은 묘하게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던 것도 같다. 20대 결혼 전- 가진 것이 없었을 때는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웠다. 어느새 작은 방 한 칸에서의 시절이 어렴풋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방을 둘러본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가득 채울 책장이 있고 비록 책상 위는 좀 흐트러져있지만 내 취향의 하얀색 책상이 있다. 아주 가끔 나 혼자 즐기는 사치스러운 비싼 핸드크림이나 향수를 사곤 한다. 그 외에는 돈을 아끼기 위한 선택을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다. 돈을 쓰는 일에 내가 기준을 정하고 필요와 상황에 따라 적정선을 취할 수 있다는 일이 자본주의 속에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를 일깨우기도 한다.


언제나 최선의 합리적인 선택을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선택들 역시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의미가 있다. 월세 10만 원 15만 원을 아끼지 못한 것은 어리석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비용을 더 지불함으로써 스스로의 먹고사는 일을 챙기는 것의 무게를 더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기도 했다. 내 선에서는 무리를 해서 30만 원 정도를 냈지만 그럼에도 작디작은 방 한 칸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마주했다. 결혼을 하면서 작은 방에서 벗어났다. 그 시절의 기억으로 지금도 일을 쉽게 그만두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가 계속 직접 돈을 벌고 싶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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