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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담 Dec 17. 2020

언젠가는 내려오겠지만 괜찮은 이유

직장 생활이라는 산을 오르고 내리다

아침 이른 시간에 시아버님의 전화를 받았다. 6차례의 항암치료를 마치고 입원중이셨기에 갑작스러운 전화에 놀랐다. 날씨가 너무 추워 옷 든든히 입으라는 전화일까- 병원에 계신 아버님의 전화를 의아해하며 네, 아버님. 하며 받았다.


내게 직접 묻진 않으시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의 분위기를 종종 뉴스로 접하시고 물어보곤 하시는데 오늘은 병원에 계시다가 어떤 기사를 보신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고 마지막으로 "회사도 어려운데 좀 힘들더래도 잘 하거래이-"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지만 다정한 말투로 이야기하셨다. 아버님은 료를 마치고 중요한 검사의 결과 판독을 하루 앞두고 계셨다. 그 와중에 서울에서 회사다니는 며느리가 별 일은 없는지 걱정이 되어 전화를 주신 것 같았다. 


작년에 복직을 했다. 올해만큼은 진급을 해야겠다는 마음에 내 나름대로는 애를 쓴 한 해였다. 직장에서 내 나름대로 애를 쓴다는 표현부터가 이미 잘못된 것이긴 하지만, 내 성향과 가진 역량, 그리고 아이가 둘인 개인적인 상황까지 고려해서 할 수 있는 만큼을 했다. 그리고 그 이상 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 않았다. 할 만큼 했다는 기준이 비록 내가 휴직하기 이전보다 훨씬 낮아진 기준이지만 말이다.


직장 생활이라는 산을 오르는 일은 작게는 일 년 단위로 오르고 내리는 일 같다. 더 길게 보면 입사하고 지금까지 계속 오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내리막을 걷고 있구나 싶기도 하다. 직장인으로 지낸 1년에 대한 성과를 받는 연말 평가라는 산을 넘었다. 오늘 공식적으로 고과 발표가 났다. 3년 사이에 육아휴직을 2번을 연이어 사용했더니 나의 최근 3년, 3번의 연말평가 기록은 사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나의 올해 평가는 2016년 이후로 처음으로 제대로 받는 고과였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업무 성과와 진급을 고려한 것이 분명한, 좋은 결과를 받았다.


팀장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 고과는 이동이 결정되기 전이었을까 후였을까. 지난 달 말 연말 평가를 하자마자 애매한 시점에 조직 이동을 예고받았다. 그 와중에 고과는 잘 받았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조직을 떠나게 되었다. 몇 달이라는 꽤 긴 시간이 남았지만 그렇게 정해진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동은 정해졌는데 지금 맡은 업무는 몇달을 더 하고 마무리 짓고 가야 하는 아주 오묘한 상황에 처했다.


끝까지 이용하고 사용하고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냐- 그런 뉘앙스의 말들을 했다. 보낼거면 바로 보내야지 그런게 어디있냐며 내 가까운 사람들도 나처럼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화를 내고 따지기에 앞서 조금 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들여다보자면 나는 작년부터 조직 이동을 희망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은 안했지만 사내 인사 시스템에 지금 당장 이동을 희망한다고 적어두기까지 했다. 내 직장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일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른 부서를 찾아서 지원할 용기까지는 내지 못하고 지내오던 중이었다. 어쩌면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난 끝까지 용기를 못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연말평가라는 지금 당장의 산은 넘었지만 내년 상반기의 시간이 쉽지 않을 것 같다. 그 산을 넘는 일이 결국에는 산을 내려오는 과정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에게는 가보고 싶은 두 번째 산이 생겼다. 남들 눈에는 처량하고 안쓰럽더라도 나에게만큼은 제법 괜찮은 여정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다.


**두번째 산 이라는 표현은 두 번째 산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다 (저저 데이비드 브룩스, 출판사 부키) 책 제목에서 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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