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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담 May 21. 2021

방 3개 화장실 2개, 2bay 아파트

스무 살.스물네 살의기억



"너네 집은 잘 사니까 그러겠지"


무슨 이유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무 살. 만으로는 생일이 안 지난 만 열여덟. 어떤 이유에서인지 친구가 화를 내며 내게 소리쳤다. 억울한 마음에 우리 집은 잘 사는 게 아니라고 받아치려 했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결국 하지 못했다.


그 다음에도 그런 비슷한 말을 몇 번 더 했는데 매번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니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어디부터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정작 우리집은 돈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엄마, 아빠, 오빠, 나. 4인으로 이루어진 가족 방3개에 화장실이 2개인, 그 시대에 각 지역마다 지어지기 시작했던 평범한 2bay 구조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분양받아 오게 된 그 아파트는 지방 도시의 신도시 택지지구였고 우리 집은 그 택지지구에서도 가장 싼 아파트 2층이었다. 돈이 부족해서 분양가가 낮은 2층을 계약한거라고 엄마는 말했던 것 같다.


그런 속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겉으로 보면 아파트단지가 모여 있는 신시가지에 방3개 화장실 2개 아파트에 살고 있는건 맞았다. 직장생활을 하는 아빠와 엄마가 있었다. 중고차였지만 자동차가 있었고. 친구 생각처럼 여유롭진 않았지만. 우리 집은 여름 휴가가 돌아올 때 마다 여행을 가지 않았다. 아빠가 사람 많고 복잡한 것이 싫다곤 했지만 돈이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중학교 시절 학교 친구들은 휴가때면 계곡이나 바다로 여행을 가는 것이 일상인 것 같았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일을 시작했다. 어릴적에도 늘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래서 일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엄마는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내가 대학생이 될 즈음까지 제법 긴 시간 유아 책 영업사원 일을 했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항상 책이 잘 팔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관리비를 여러달 밀려 전기와 수도가 끊긴 적도 있었다. 주말부부로 지내 사정을 모르던 아빠가 이야길 듣고 어떻게 돈이 없다고 해서 관리비를 안낼 수가 있냐 화를 내며 밀린 관리비를 내어주는 것으로 곧 해결은 되었지만 가난한건 아니었더라도 돈이 늘 문제였다.


중학교때는 친구들이랑 만나서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오락실에 가고 햄버거를 사먹으며 놀곤 했는데, 놀러 나갈 생각에 용돈을 달라고 미리 말하면 엄마는 곤란해하는 내색을 보였다. 말할 때 마다 바로 바로 용돈을 받지 못하다보니, 말하지 않고 그냥 돈 없이 나가기도 했다. 가끔은 엄마 몰래 지갑에서 5천원이나 만원을 빼가기도 했다. 그마저 없을 때면 나 깜빡하고 안가져왔다고 둘러대기도 하고. 용돈이 넉넉했던 친구의 돈으로 같이 게임을 하고 먹을 것을 사먹곤 했다. 너 또 돈안가져오면 어떡하냐는 이야길 들으면서도, 친구를 만나서 수다 떨며 노는게 마냥 즐거웠기에.







우리 집에서 돈은 언제나 부족한 그런 것이었다.


내가 취직을 하고 엄마가 종종 내게 돈을 달라 이야기를 했다. 왜 나한테 달라는 거냐고 전화기 건너의 엄마에게 짜증을 퍼붓기도 했다. 대기업에 취직하고 꼬박 월급을 받으면서도 인색한 딸이 엄마는 못마땅했다. 지밖에 모르는 기집애라고 내 뒤통수를 향해 말을 하기도 했다. 지 혼자서 다 큰 줄 안다며 꼭 한마디씩 더 붙이면서.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돈을 보내라는 문자를 받거나 화를 내는 엄마의 전화를 받는 일은 참 싫은 일이었다. 그렇게 매번 엄마와 싸웠지만 내가 진짜 독립을 하는데 필요한 돈을 모으는 것이 우선이었다. 꾸역꾸역 월급을 모았다.


스물네살. 고등학교때부터 가고 싶었던 서울로 취업을 했다. 서울로 간다는 것은 내가 혼자 살 곳을 찾아야한다는 의미였다. 첫 독립의 시작은 이모네 집 방 한 칸이었다. 이모네 집이 회사에서 무척 가까웠고 흔쾌히 와서 지내라고 엄마의 부탁을 들어주셨다. 여자애가 혼자 나가 사는 것보다야 이모네 집에서 지내며 1년을 보내는 것이 더 낫겠다고도 했고, 싫든 좋든 난 당장 돈이 없었으니 선택할 길은 없었다.

이모네 아파트는 참 컸다. 방이 5개였고 거실도 주방도 현관도 베란다도 전부 다 넓었다. 붙박이 장이 있고 컴퓨터 책상이 있던 남는 방 하나를 내가 썼다. 보증금 없이 매달 20만원을 드리고 1년을 살았다.


나는 빨리 진짜 독립이 하고 싶었다. 금요일이면 출근하면서 짐을 싸서 가방을 들고 회사로 갔다. 퇴근과 동시에 버스터미널로 가서 2시간 걸려 집으로 갔다. 일요일 밤이나 월요일 새벽에 다시 올라왔다. 매주 그렇게 집에 갔다. 주말에 굳이 먼 거리의 집까지 가지 않더라도 혼자서 편히 누워 쉴 곳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러려면 원룸 보증금 천만원이 필요했다. 한달에 150만원씩 모으면 1년이면 충분했다.


1년이 지나 만기가 돌아온 적금통장으로 보증금 천에 월세 28만원의 방을 구했다. 혼자서 방을 보러 왔다면서 회사에서 가까운 곳 두군데를 골라 부동산 중개소에 들어갔다. 몇몇 집을 소개 받고 그 중 지어진 지 오래되지 않아 깨끗한 편에 지하철역에서 가장 가까운 집을 선택했다. 작았지만 혼자 살기에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등기부 등본 보는 것도 모른 채 계약을 하고 수수료를 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사기당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다 싶다. 5평 쯤 되었을까? 아니 그 집은 유독 더 작았으니 4평이나 되었을까 모르겠다. 손바닥 만한 작은 공간에 거실겸 주방겸 방이 모두 합쳐져 있었다. 창문은 있었지만 바로 앞 건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파란색 통돌이 세탁기가 공용으로 복도에 한층에 한 대씩 있었다. 공용이니 눈치를 봐가며 사용해야 하는 것이 단점이었지만 지하철 역에서 가장 가까웠고 가격이 싸서 그정도면 감당할 만했다.


책과 옷가지, 얼마되지 않는 짐을 챙겨 원룸으로 이사를 했다. 짐을 챙겨 들어와보니 이모네 집이 진짜 컸다는 것이 와닿았다. 내가 구한 원룸이 이모네 집에서 살던 방 한칸보다도 작았다. 아니 이모네 집에 식탁이 놓여있던 다이닝룸 공간 보다도 작았다. 지극하게 평범했던 방3개에 화장실 2개의 2bay 아파트는 나에게 더이상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아파트 단지가 모여 있는 동네. 반듯한 인도와 잘 심어진 가로수. 조금 걸어가면 산책하기 좋은 작은 언덕과 깨끗하게 조성된 공원이 바로 옆에 있던 곳. 이건 정말로 잘 사는게 아니야, 알고 보면 우리 집은 돈이 없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그것. 깨끗하고 널찍한 인도와 가로수, 아파트는 더이상 내흔한 것이 아니었다.


방3개 화장실 2개의 아파트가 갑자기 닿을 수 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스물넷에서 막 스물다섯이 된  어느 해의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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