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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담 Jan 20. 2021

그 겨울의 기억과 기내용 캐리어.


얼마 전 눈이 내린 출근길



여러 개의 드륵드륵 소리가 겹쳐지고 흩어졌다. 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걸었다. 숨을 내쉬면 하얀 입김이 보였다 이내 사라졌다. 나는 스타킹에 구두를 신고 치마를 입고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젖살이 다 안 빠진 통통한 볼에 하얀 얼굴은 라인이 둥글게 매끈했고 눈이 아주 작아 보이는 두터운 은테 안경을 꼈다. 손잡이를 길게 빼고 끌고 간 캐리어는 작은 기내용 사이즈였는데 전체적으로 옅은 회색에 주황색 포인트 컬러가 들어 있었다.

시장 골목의 가방가게에 들어가 바퀴 달린 그 캐리어를 골랐다. 옅은 회색은 얼핏 세련되어 보일 법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없어도 될 형광빛 주황 지퍼라인이 포인트로 가방을 한 바퀴 두르고 있었다. 표면에는 무늬가 있어 울퉁불퉁했으며 소프트인지 하드인지 플라스틱인지 천인지 조차 애매했다. 그 애매한 가방을 산 이유는 비슷비슷한 기내용 캐리어 중에서 가격이 가장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없어도 될 주황색 포인트 때문에 자꾸만 더 가방에 눈이 갔다. 그냥 더 비싸도 검정색이나 갈색 캐리어을 살 것을 그랬다.


걸어가는 길그 전 지하철 안에서부터 정장 위에 검정색 코트를 걸친 이들이 눈에 띄었다. 하나같이 앳띤 얼굴이었다. 사람이 드문 이른 시간, 업무지구를 지나쳐 몇 정거장을 더 지나 같은 지하철역에서 내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같은 버스라는 것을. 추운 겨울 아침 버스 안의 공기는 정장 코트와 오리털 점퍼를 벗어 정리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가득했다가 다시 어색한 침묵과 정체모를 설렘으로 바뀌기를 몇 번 더 반복하고서 출발했다.


16년쯤 지났을까? 신입사원 교육을 받았던 그때 그 장소에서 아직도 생각나는 신입사원 교육 담당자의 한마디가 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다 똑똑한 사람들이에요. 이 곳의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더 잘나고 일 잘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회사생활에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신입사원 교육 담당자의 얼굴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사회 초년생 티가 났다. 차려입은 양복 상의는 새 것인 듯 광택이 살아 있고 어깨 각이 반듯했다. 입사한 지 1년이나 2년 쯔음 되었을까. "여기 있는 사람들"을 특정 그룹으로 은연중에 묶어버린 그 발언은 오만한 표현이기도 했다. 시작을 앞둔 설렘과 긴장 탓이었는지, 아니면 어찌 되었건 내가 그 안에 속해있다는 것조차도 기분이 좋아서였는지 그때는 그불편함을 느낄 틈도 없었다. 그저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반짝이며 교육 담당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이고 끄덕였을 뿐.





별다르게 눈에 띄이지 않는 외관의 공대 건물. 하얀색이라기엔 누랬고 아이보리빛이라기엔 칙칙한 색깔의 건물이었다. 아마도 아이보리나 베이지였을 컬러로 칠한 페인트가 흐려지고 때가 타서였을 것이다. 전통이 느껴지지 않고 세월의 흐름만 느껴지는 공대 건물 낡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손 때가 탄 책상에서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던 일이 엊그제였는데 그 겨울 나는 갑자기 내부가 하얗고 차분한 회색으로 잘 정돈되어 있는 낡았지만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는 공간에 놓여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어서 말이다. 코트를 입고 구두를 신은 채 호호 불면 하얀 입김이 나오던 그 겨울은 졸업식도 하기 전의 겨울이었다.


이제는 시장에서 캐리어를 사지 않는다. 결혼하면서 백화점 매장에서 제법 큰돈 39만 원을 주고 샀던 이태리 브랜드의 기내용 캐리어가 그 자리를 대신한 지 오래이다. 그 시장에서 샀던 회색도 은색도 아닌 캐리어는 1~2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고장이 나서 바로 버렸던 것 같다. 11년, 12년 전에 삼십만원이 넘는 돈은 작은 금액이 아니었다. 그 캐리어는 십 년이 넘도록 일 년에 몇 번이고 부모님 댁을 오갈 때 가져가고 우리의 모든 여행과 함께 했는데도 여전히 멀쩡하게 사용할 수가 있어 참 신기하기도 하다. 다만  같은 브랜드에서 같은 제품을 다시 사고 싶은데 이제는 가격이 오십만 원대로 올랐고 바로 사지 못했다. 아직도 고민 하고 있다. 고민하지 않고 바로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받았던 첫 월급이 아직도 생생하다. 월급 통장에 찍힌 금액은 135만 원이었다. 그 월급이 한달에 한번 나오거나 두 번 나오거나 하며 번갈아서 통장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하면 적은 돈이지만, 그때는 그 돈이 매달 있었기에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다. 월급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컸을 때 나는 그만큼 회사에 더 열정을 쏟았다. 매달 들어오는 월급의 의미가 내게 작아진 것처럼 내가 회사에 쏟는 열정도 에너지도 작아졌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 월급이 지금까지 16년, 17년이 되어가는 긴 시간동안 단 한 번도 끊이지 않고 꼬박 꼬박 통장에 들어왔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외부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월급은 매달 나오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참 감사한 일이다.


소극적으로 투덜거리는 일만큼은 그만두어야겠다. 이제는 도리어 나는 그 월급에 걸맞는 합당한 노동력을 제공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내가 지금까지 제공한 가치는 무엇이었고 앞으로 제공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이 대체가능한 것이 아닌 나만의 것이기를 희망한다. 50만원이 넘는 캐리어를 그리 길게 고민하지 않고 바로 살 수 있는 그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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