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엄마로 지내는 것이 그냥 되는 게 아니었네
육아휴직한 직장인의 서툰 엄마 기록
얇은 봄 코트를 걸치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달력의 숫자는 봄이어도 1층 현관 자동문이 열리면서 코에 스치는 공기가 아직 서늘했다.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가니 해가 비치며 봄 날씨가 느껴졌다. 두 발을 바삐 움직여 걸으면서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12시 50분. 길에 사람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나 늦은 건가? 저 멀리 학교 후문 앞을 내다 보니 엄마들이 몇 명 없다. 길에도 사람이 거의 없고. 아, 오늘은 1시 10분에 나오던가? 너무 빨리 나왔나?
하교 시간보다 일찍 나온 것을 알아차리며 걸음을 이어갔다. 어린이집, 유치원 때와 다르게 초등학교는 요일 별로 하교 시간이 달랐다. 막 입학한 1학년은 첫 4주간 단축 수업까지 했다. 더 헷갈렸다. 아이의 하교길을 거꾸로 걸어가 후문 앞에 도착해서 아이를 기다리는 사이에 나보다도 먼저 도착해 있는 다른 엄마를 힐끗 쳐다보았다. 짧은 단발에 화장기 없는 얼굴. 옷은 편안해 보이는데 날씬했다. 나처럼 집에 있다가 데리러 온거겠지? 나랑 같은 휴직맘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육아를 맡아온 엄마일까, 이런 저런 생각하는 사이 아이보리 자켓을 입고 마스카라에 볼터치를 한 또렷한 얼굴이 보인다. 웨이브진 긴 머리는 신경 써 손질한 듯 자연스럽고 단정했다. 길건너 학교 앞 피아노 원장님이었을거다. 아마도.
아이를 기다리는 5분, 10분,.. 점점 모여드는 엄마들을 나도 모르게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 속에 유독 목소리가 큰 세 명의 엄마들이 보였다. 저들은 항상 같이 모여 있네.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길래, 저렇게 친해보이는 걸까. 같은 유치원? 같은 반? 아직 반모임도 하기 전인데- 같은 반은 아니겠지. 세 명의 엄마들로 자꾸만 시선이 가 머리스타일이며 신발을 한번씩 체크해보다가, 문득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후다닥 나온 내 모습이 생각나 곧 시선을 돌렸다. 거울 한 번 더 보고 머리라도 좀 빗고 나올 걸.
후문 앞 노란 학원 셔틀버스가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점차 더 많은 엄마들이 무리를 짓고 나누는 대화 소리가 커진다. 이야기 소리에 웃음소리와 인사하는 소리들이 섞여 가득 차고 내 귀가 아파올 즈음이면 커다란 책가방을 맨 아이들이 선생님을 뒤따라 나오기 시작한다. 아이들과 엄마들이 만나 더 복잡해진 탓에 고개를 빼꼼 내밀어 키가 유독 크고 긴 생머리의 담임 선생님이 있나 찾아보았지만 아직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을 따라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재롱잔치를 할 때 선생님 손잡고 무대로 올라오던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세 살이었나 네 살이었나. 한줄기차를 서서 무대로 나오는데 가장 앞에 서 있던 모습. 그땐 그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는데- 어느새 키가 큰 생머리의 선생님이 보였다. 그 옆으로 볼이 통통한 연두색 가방을 멘 아이도 보였다. 수인아- 부를까 하다 왠지 좀 부끄러운 마음에 조용히 손만 흔들었다. 몇 초 되지 않는 그 사이에 엄마를 못 보고 다른 곳을 보며 걸어오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데 마음이 찡해왔다. 나를 발견하자 아이는 손을 흔들고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보였다. 아이도 나도 빠르게 종종 걸었다. 안녕. 학교 잘 다녀왔어? 말하던 나도 아이처럼 웃고 있었을까.
8시 30분에 헤어져 12시 50분, 아니 1시 15분쯔음에 만나며 주고 받았던 애틋한 그 마음은 금방 어디로 갔는지. 집까지의 짧은 하교길에 오늘 학교는 어땠는지 묻고 대답하면서 내 머릿속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이제 1시 15분. 아이랑 뭘 하지? 집으로 가? 아님 아파트 놀이터로 가봐? 입학하고 얼마 안 되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보니 집으로 가는 날도 많았는데 그런 날이면 오후 시간이 느려도 너무 느리게 갔다. 이 날은 그냥 집으로 들어왔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 시간 속에 아이는 식탁에 앉아 태평하게 간식을 먹고 있었다. 아이를 쳐다 보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수인아, 너 피아노 학원 가고 싶지 않아? 7살에 피아노 배우다가 이사 오면서 못 쳤잖아.. 집 바로 앞에 피아노 학원 있는데 거기 가볼까?"
"아니 난 싫은데.. 안 가고 싶은데.."
"아니야 수인아, 너도 심심하지? 집에서 계속 이렇게 있으면. 학원가서 피아노 배우고 와서 그 후에 놀면 되지."
"학원은 안 갈래."
"그럼 뭐하게? 집에서 놀 것도 없는데."
"그냥 집에 있을래 난."
몇 번은 놀이터로 가서 얼굴을 여러 번 마주친 엄마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 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학교로 가서 책가방을 들고 단지로 돌아와 놀이터에 있는 엄마들은 다 1학년 엄마였으니까 굳이 아이 학년을 물을 필요는 없었다. 짧게 몇 반이에요? 물어보고 이어서 아이의 이름을 묻고 대답하면서 인사를 이어갔다. 얼굴을 텄더니, 다음 대화는 자연스레 ㅇㅇ는 어느 학원 다녀요? 영어학원 다녀요? 로 연결되었다. 이미 어학원을 다니고 있어 셔틀버스 타기 전까지 잠시 간식먹고 노는 아이. 우리 아이처럼 그냥 놀고 있는 아이. 스케줄은 제각각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학구열 높은 지역에 사는 어린이집 친구 생각이 났다. 스케이트, 영어, 수영. 피아노. 학교에 가기 전부터 다양한 예체능 수업을 듣고 있었다. 영어는 영어유치원을 나왔고. 엄마랑 대화하면서도 영어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아이의 친구. 내가 지금 놀이터에 서서 그저 놀고 있는 저 아이를 기다리고만 있어도 되는 걸까?..
길고 긴 대화의 탈을 쓴 끈질긴 나의 요구에 못 이겨 입학 한 달 만에 집이 더 좋다던 아이는 가까운 사고력 수학 교습소에 다니기 시작했다. 주 2회 수업. 교습소가 개원을 하면서 보드게임 체험 수업을 열었고, 그때 참여해보더니 보드 게임이 재밌다며 아이가 또 가고 싶다고 말했기에 다행히 순조로웠다. 체험 수업 신청은 물론 아이에게는 묻지 않고 내마음대로 한 것이었지만.
교육에 열성적인 엄마는 아니었다. 선행학습이나 조기교육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공부 잘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도 절반, 어린 시절 교육비 투자는 아깝다는 생각 절반.그렇지만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그저 나랑 오후 내내 붙어있는 아이를 지켜보며 그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여유 있는 엄마도 못되었다. 어린아이를 셔틀버스까지 태우면서 비싼 사교육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갈팡질팡 하면서 비용이 저렴하고 가깝고, 선행학습처럼 진도를 빼지 않는 집 앞 교습소는 괜찮지 않은가? 싶었다. 주2회 수업 중 1번은 교과 문제집을 풀었고 1번은 사고력 문제를 풀고 아이가 좋아하는 보드게임을 했다. 그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타협을 봤다.
아이가 학원에 가는 스케줄이 생기자 내 마음이 약간 편안해졌다. 아이가 어릴 땐 함께하지 못한 시간들이 그렇게 애잔할 수가 없더니 아이랑 오후 내내 붙어 있는 것이 힘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제법 자라 손이 안 가는 8살인 아이였는데. 친정 엄마가 육아휴직 전, 아이를 봐주실 때면 한글 학습지나 다른 공부할 뭔가를 좀 시켜보지 그러냐 하셨고, 그럴 때 마다 엄마, 어릴 때 학습지 공부는 필요 없어요- 효과 대비 돈이 아까워. 그냥 책 많이 읽고 놀면 되지 하고 고집을 부리고 거절했는데. 퇴근하고 와서 저녁에 잠깐 아이를 만나는 일상에서 매일 아침 학교를 같이 가고, 매일 하교 시간에 맞추어 아이를 데리러 가는 일상으로 바뀌고 한 달. 난 집에서 노는 게 좋다는 아이를 기어이 학원에 등록하고 어휴- 숨을 내쉬었다. 그다음엔 피아노, 미술. 연이어서 등록한 것까지는 말할 필요도 없이.
아무것도 안했을 때. 넌 가장 편안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