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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담 Jul 24. 2021

달리다 보면 앞서갈 거라며.

페퍼톤스의 FAST

노래는 오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오르게 하는 힘이 있다. 어딘가에 꽁꽁 숨겨두고 잊고 지내던 시간들을 기어이 찾아내고야 만다. 몇 년을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던 페퍼톤스의 노래는 내게 더 긴 삶의 장면들을 떠오르게 한다.


스물넷-다섯 즈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멜로디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붉은 레인을 질주하는 스프린-터, 거대한 익룡의 저 그림자처럼-” 독특한 가사로 시작하는 페퍼톤스의 Ready and get set go였다. 공부를 무척이나 잘했던 두 사람이 밴드를 만들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공부를 잘하면 그것을 선택하는 게 당연했던 것 같은데 그들은 음악을 선택했다.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쓰고 기타와 베이스를 연주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했다. 어느새 나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온전히 엄마의 삶도 아니었고 회사 일에 전념하는 삶도 아니었다. 엄마와 회사원 그 사이를 매일 오가는 삶이었다. 어린이집 원아수첩을 적는 일,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는 일, 아이의 반찬 만드는 일 등을 모두 해내기에 하루는 짧았다. 뜨끈한 샤워기 물을 틀어 놓은 채 물줄기를 맞아가며 몇 분이라도 더 넋을 놓고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내가 아이를 키우고 회사 일을 하며 살아가는 동안 그들은 앨범을 계속 냈다. 나이가 들어도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희망과 청춘을 노래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내게 페퍼톤스의 노래는 현실 밖 이상이었다. 일이 막혀 풀리지 않을 때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답답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월급의 크기만큼 내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영역이 컸다. 월급이 나오는 곳이자 내 소속. 가진 것 없는 지방대학교 출신에서 원하던 서울에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어준 직장이었다. 나는 계속 그곳에 속해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꿈을 좇는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번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집 앞 미술학원에 다녔는데 종종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기고 홀로 남아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몰입의 순수한 즐거움을 주었다. 개발자의 일도 그와 조금 닮은 구석이 있었다. 짧으면 몇 분, 길면 몇 날 며칠을 헤매고 틀리고 반복하다 보면 결국엔 원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때마다 느껴지는 희열이 있었다. 좋아하는 일이라도 항상 재미있을 리는 없었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답을 찾지 못했을 때면 좌절과 실패감에 휩싸였다.



마흔이 가까워진 어느 날이었다.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진 후였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지하 주차장에서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오르막길에서 잠시 브레이크를 밟고 앞차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차 안에는 페퍼톤스의 FAST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나의 시야에 앞차 후미등의 붉은빛이 잠시 어른거렸다. 눈을 한번 감았다 떠보았더니 밤하늘이 들어왔다. 늦은 시간 켜져 있는 건물의 불빛과 가로등 불빛함께였다. 지금껏 듣고 또 듣던 노래의 가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달리다 보면 앞서갈 거라며 빛보다 빠른 기차에 올라타 본다

눈을 감는다 귀를 막는다.

어디를 향한 건지 끊임없이 달리는 기찻길 소리


내 자신이 알던 내가 조금씩 멀어져 가 조금씩 바래져 가

어느새 눈을 떠보면 펼쳐지는 새 하늘“



모두가 눈을 감고 빠른 기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나도 남편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육아와 직장생활로 바쁜 일상은 길게 이어졌다. 어쩌면 그 속에서 충분히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온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 행복하냐는 물음에는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평범한 삶의 테두리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며 지내왔다. 나도 우리 아이도, 평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큰일 나는 줄만 알았다.


내 안의 솔직한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차분히 하던 것을 멈추고 더 귀를 기울여야 했다. 내가 더 바래지기 전에 감고 있던 눈을 떠야 했다. 한 때는 재미를 느꼈던 일이었지만 그저 지루해진 것일지 모른다. 처음부터 시작하자니 자신이 없어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마흔이라는 나이를 떠올리자 이제는 내 삶과 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상한 적도 없는 꿈을 찾아 떠나온 사람들 속에

부푼 내 가슴 안에 조금씩 자리 잡은 새로운 다짐들

어느새 눈을 떠보면 내가 꿈꾸던 세상“


거창한 무언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 작은 일부터 해보기로 했다. 책을 읽고 깨달은 점을 정리하고 짤막한 글을 썼다. 글을 쓰다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였고 그들과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발을 바닥에 내딛기 위해 빠르게 달리던 기차의 속도를 느리게 조절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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