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육아휴직을 냈을 때였다. 동네에 수영장이 있는 생활체육관에 가서 수영 강습을 신청했다. 수영장에 가면 운동하기 전후로 샤워를 하게 되는데 그때 다른 사람이 쓰는 샴푸와 바디제품이 슬쩍 보인다. 목욕바구니나 수영가방을 보면 대체로 해피바스 바디워시나 클렌징 폼, 미장센 샴푸린스 같은 마트의 제품들이었던 것 같다. 내 가방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날도 수영강습을 마치고 샤워실로 나왔을 때였다. 몇 번 차를 같이 마신 적이 있는 같은 레일의 언니가 옆에서 머리를 막 감으려고 샴푸를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목욕 바구니에서 아베다 샴푸가 보였다.
'저 분에겐 아베다 샴푸가 자연스러운 일상이구나.'
몇초를 더 샴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전에 운동을 마치고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자녀 교육에 관심과 시간을 쏟고 있다고 들었다. 본인을 위한 시간에는 수영에 재미를 느끼며 무척 몰입하고 있었다. 수영을 더 잘하기 위해 강습을 2개나 연속으로 들었고 저녁에는 프라이빗 수영장 회원권을 하나 더 끊어서 자유수영을 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육에도 신경을 많이 쓰지만 남들을 쫓아가기 위한 사교육 뺑뺑이는 아니었다. 아이 스스로 학습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부모의 역할에 무게를 두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이의 독서 지도와 영어 원서 읽기, 독서 토론을 꾸려가는 것에 신경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는 부동산 투자 가치가 높은 곳에 신축 아파트를 사두기도 했는데, 교육을 고려해서 학군이 좋은 곳에서 전세로 산다고 말했다. 운동하러 수영장에 올 때는 제법 연식이 된 하늘색 경차와 함께 였다. 재테크도 잘하고 경제적인 관념도 또렷해 보인, 매일 자신을 위한 맛있는 커피 한잔을 즐긴다고 말했던 그녀가 사용하는 샴푸가 아베다였다. 아베다. 록시땅 같은 백화점과 면세점 매장 브랜드 욕실제품에 대한 선망이 더욱 또렷해진 것은 그때부터였을지 모르겠다.
결혼 전에는 해외 출장을 매년 나갔고 결혼 후에는 한동안 남편이 매년 해외를 나갔다. 자연스레 그때마다 면세점 상품 쇼핑을 했다. 면세점에서 평소에 구매하지 않는 바비 브라운과 디올의 화장품을 사는 것처럼 록시땅, 몰튼 브라운 같은 왠지 내 돈 주고 사기가 아까운 바디 헤어 제품들을 종종 샀다. 나도 록시땅이나 몰튼 브라운 제품을 욕실에 두고 사용했지만... 그것은 가끔 사용하는 제품이었다. 면세점에서 구매한 것을 다 사용한 후에 다시 그 제품을 사지 않았다. 수영장에 갈 때처럼 일상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생활 소모품에 속하고 겉으로 티도 나지 않는 샴푸린스를 브랜드 제품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내게 여러 가지를 의미했다. 겉으로 바로 표가 나는 외제차를 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가 사용하는 제품에 가치를 두고 비용을 들이는 것.
내가 생각하는 부유함의 기준이었나 보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을 안방 욕실에 록시땅이나 아베다 샴푸, 이솝 핸드워시와 로션을 두고 사용하는 일상. 욕실 문을 열면 호텔 어메니티에서 풍기는 것처럼 이국적인 향으로 가득한 공간.
고작 그런 샴푸린스나 바디워시에 부유함의 기준을 두느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몇만 원 하는 그것이 그렇게 갖고 싶다면 그냥 사서 쓰지 궁상맞다고 말이다. 록시땅이나 아베다는 3~4만 원대로 살 수 있고 이솝 핸드워시나 샴푸 린스는 한통에 5만 원 정도이다. 단일 제품으로 보면 그리 비싸다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가성비, 경제성, 알뜰함과는 거리가 있는 가격이다.
다른 브랜드에 비해 이솝은 유독 간결한 디자인과 고집 있는 철학으로 사람들이 더더욱 선호하는 것 같다. 분명한 취향과 선호를 드러내 주는 제품으로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 가격은 비싸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면 아무리 내가 이솝이 추구하는 철학과 통하는 가치관을 지녔다 하더라도 소모품으로 반복해서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이런 제품들을 일상 소모품으로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면 그때는 나 스스로 부자가 되었다는 기분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사서 쓰고 부자의 기분 실컷 누리고 다른 곳에서 돈을 아끼세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고민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브랜드는 아니지만 샴푸를 바꾼 지 좀 되었다. 아베다에서 쿠팡 구매 대용량 제품을 사용해보다가 지금 제품으로 정착했는데...
착한 성분의 샴푸로 소문난 청미정 브랜드의 샴푸와 린스를 쓴다. 안방 욕실에서 열두 살인 첫째 아이와 같이 사용하고 있다. 500ml 용량에 2만 8천5백 원. 분명히 마트보다는 비싸고 록시땅, 아베다에 비해 엄청 싼 가격도 아니다.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조금 더 저렴한 한방성분의 탈모예방 샴푸를 내어주었다.) 나는 결국 가성비와 성분 둘 다 포기하지 못했다. "착한 성분"으로 만들어진 "국내 생산" 샴푸를 택했다. 미장센과 이솝 사이에서 "비싸지만 착한 성분"의 제품으로 합의점을 찾은 셈이다. 제법 가격이 나가는 편인데 제품 용기 디자인에서는 아쉬움을 느낀다. 한 동안은 록시땅에서 500ml 샴푸린스 세트를 한번 사고, 그 이후에 다시 청미정 샴푸린스를 사서 리필해서 쓸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제로 웨이스트로 샴푸 린스를 리필해서 쓰는 트렌드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린스를 용기에 덜어서 사용해본 적이 있기에 그건 안 하기로 마음을 돌려 먹었다. 꾸덕꾸덕한 린스를 다른 통으로 옮겨 담는 일은 피곤했기 때문이다.
청미정 샴푸를 사용한 지 일 년. 샴푸가 줄어드는 속도를 보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아리다. 500ml가 적은 용량은 아닌데 착한 성분인 만큼 마트 제품보다는 거품이 적은 편이다. 쫀득한 샴푸의 전형적인 제형이 아니고 물처럼 흐르곤 해서 한 번 머리 감을 때 마트 샴푸보다 2배는 더 사용하는 것 같다. 나는 머리숱이 적은 단발머리인데 열두 살 첫째는 머리가 길고 숱이 많다. 한참 사춘기라서 두피에 유분마저 넘쳐난다. 금방 머리에 기름이 돌기에 아이에게는 머리 감을 때 무조건 샴푸를 두 번씩 해야 한다고 안내해 주기도 했다.
지금 당장 그걸 살 수 있는 현금이 없는 문제는 아니다. 삶에 대한 시선을 좀 더 현재로 두면 못 살 일도 아니긴 하다. (남편은 반대를 하겠지만) 계속해서 원하는 브랜드의 소모품으로 일상을 채우는 소비 성향을 이어갈 정도의 여유가 되느냐. 그것에서 물음표이다. 계속 가성비에서 헤매고 있다.
-조금 더 비싼 가격만큼 성분이 정말 더 좋을까?
-다른 건 몰라도 냄새는 분명 좋았던 것 같은데.
-가성비나 성분보다 브랜드를 곁에 두는 게 의미가 있는 거지.
-그건 결국 허영이고 마케팅에 속는 것 아니야?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아마 다음 달에도 같은 제품을 구매하게 될 테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는 삶을 꿈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