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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May 20. 2019

일주일 간의 서울 메이트 생활


나 지금 헬싱키에서 스탑오버 중인데 핀란드에서 뭐 사다 주고 싶어!
원하는 거 있어?


몇 달 전부터 내게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알리며 이것저것 묻던 프란지가 드디어 한국에 오게 된 날이다. 베를린에 사는 독일인인 프란지와는 교환학생 중에 알게 된 사이인데, 그때는 별로 친하진 않았으나 전공이 같고 생각이 잘 통해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를 자주 나눴던 기억이 있다. 프란지는 한국이라고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그 사실 자체밖에 모르는 부모님과 친구, 동료들 사이에서 한국 여행을 고대하는 매우 특이한 사람이다. 프란지는 벌써 몇 달 전부터 한국에서 하고 싶은 것들의 리스트를 보내왔으며, 이 중 같이 하고 싶은 것을 체크해서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 프란지가 한국행 비행기 탑승 하루 전날 사다 줄 것이 있냐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음, 포르투갈 여행할 때 머그컵을 꼭 사 오고 싶었는데 짐이 많아서 결국 못 사 왔어. 요즘도 계속 감각적이고 이국적인 디자인의 머그컵을 찾고 있긴 한데, 지나가다 보고 혹시나 괜찮은 거 보면 사다 줘! 짐 무게나 깨질 위험이 걱정되면 안 사다 줘도 괜찮아!


핀란드 Marimekko 머그컵

종각 역 금강제화 앞에 서있는데 큰 검은 봉지를 들고 다가오는 프란지가 보였다. 아니, 사실은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고 몇 년이나 흘러 외양도 달라진 프란지를 먼저 알아보지는 못했다. 멀리서 나를 보고 손을 흔들기에 아 프란지구나 하고.

빙수를 먹어보고 싶다기에 인사동의 빙수집에 데려갔고, 빙수를 기다리며 나에게 줄 선물이 담겨있는 검은 봉투 속에서 꺼낸 포장된 상자를 열어보았다. 와 기대된다 두근두근. 상자 속에는 깨질까 봐 세 겹 네 겹 싸여있는 머그컵이 있었다. 색깔은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이었는데, 유럽 느낌의 디자인을 기대한 것과 달리 와우 굉장히 동양 느낌의 디자인이어서 약간은 당황하였다. 프란지도 머쓱해하며 made in thailand이지만 Finnish design이라고 강조하였다.


머그컵과 함께 가져온 것은 초콜릿 두 상자와 우리 엄마에게 주라는 비타민. 작년에 암 치료를 받았다는 얘기가 생각나서 고려해서 사온 것이 사려 깊게 느껴졌다. 또, 엄마가 알콜 알러지가 있다고 한 말을 떠올리고는 나중에 메시지를 보내 혹시 초콜릿 벌써 먹었냐며 자기가 준 초콜릿 두 종류에 알콜이 들어있다고 뒤에 써있는 그림을 보고 먹으라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사실 팥빙수가 제일 맛있는데, 단팥에 대한 도전정신이 부족했던 프란지는 딸기+녹차 빙수를 골랐다.역시나 우리 둘 다 그다지 맛은 없었다. 나중에 시장에서 단팥이 묻어있던 떡을 먹어본 프란지는 단팥과 떡 모두 이렇게 맛있을 수 있냐며, 남은 일정 동안 떡 살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사서 먹겠노라고 말했다.



우리의 대화 장면은 영화 같다

막걸리 테이스팅!

우리는 인사동-북촌-삼청동-경복궁을 지나 서촌-광화문-을지로를 걸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걸으며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메라를 들고 따라온다면 이 골목 저 골목 공간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비포 선라이즈 같다.


한국에서 취업하기가 얼마나 치열한지, 친구들이 얼마나 결혼했는지, 한국의 결혼식 문화는 어떤지, 혼자 여행을 좋아하는지, 이후에 어느 나라를 제일 처음 여행하고 싶은지, 어느 시대로 가서 살아보고 싶은지,
베를린의 자전거 도로는 어떤지, 베를린은 어떤지, 베를린에서 사는 주거비는 얼마나 드는지,
요즘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어떤 종류의 영화를 좋아하는지, 미드나잇 인 파리가 어땠는지, 파리는 어떤지, 우디 앨런 영화는 좋아하는지, 오웬 윌슨을 왜 좋아하는지, 요즘 보는 한국 드라마는 뭐인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퇴근 후 베를린에서의 일상은 어떤지, 터키, 아랍인 이민자에 대한 독일인들의 생각은 어떤지, 한국은 이제 주 52시간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독일에서는 일주일에 몇 시간 동안 일하는지, 독일도 정규직 계약직 개념이 있는지, 예멘 사태와 이민자에 대한 여론은 어떠한지, 남북관계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어떠한지, 독일 동부지역의 사람들은 어떠한지 등


서로의 질문에 답하고 묻다 보면 나의 삶과 한국 사회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평소 나의 생각은 어떠한지 다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한국인에게는 일상적으로 호응받지 못하는 나의 생각들을 공감 받기도 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되기도 한다. 고향 함부르크에 있는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지도 않았던 먼 미지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둘 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 영화, 오웬 윌슨의 영화 모두를 좋아하고 함께 이야기한 사안에 대한 대부분의 생각이 비슷했다.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베를린은 의외로 자전거 도로가 전혀 발달하지 않았으며 독일에서는 법정 근로시간이 무려 주 40시간이고(프란지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다면), 독일은 결혼식을 위해 웨딩드레스를 빌리는 문화가 없다. 한국인들보다 체형이 더 다양해서이기도 하고 일생에 한 번인 결혼식을 위해 드레스를 빌려 입는다는 개념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몇 백만 원 하는 드레스를 사야 해서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한다. 물론 한국도 웨딩드레스를 빌리는 데 몇 백만 원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한 번 입기 위해 옷을 산다는 것은 좀 그렇다. 그래서 독일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공유하는 플랫폼을 만드는 사업을 해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 자체가 결혼하는 사람보다는 동거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추세라고 하니 그다지 성공할 사업 아이템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프란지 역시 결혼식에 축의금을 걷는 한국의 결혼식 문화에 경악했다. 친구가 결혼할 때 작은 선물을 줄 수는 있지만 결혼식장 입구에서 돈을 걷고 식권을 나누어주는 문화가 사실 이해가지 않는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다. 돈을 걷어야만 하는 건 결혼식을 크게 하고 허례허식에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라는 평소 생각이다. 초대하고 싶은 사람만 초대하고 결혼식 한다고 빚을 지지 않고 분수껏 하면 어떠한가. 아니면 결혼식을 생략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한국인 친구랑 얘기하다가 친구의 회사에서는 결혼식뿐 아니라 상사의 부인의 할머니 장례식까지 팀에서 조의금을 걷어서 내야 한다고 하는데, 타의에 의해 마음에도 없는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거부감이 든다.


자주 들어보았듯이 독일에서는 동거를 많이 한다고 한다. 아이를 낳고도 결혼하지 않고 그냥 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프란지가 크리스마스에 부모님 댁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자기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와 그 여자 친구, 그 여자 친구의 어머니가 식탁에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는 사진이었다. 예전에 스웨덴 친구가 자기 남자 친구와 함께 부모님 댁에 자주 가서 크리스마스나 새해를 보내는 얘기를 해주었는데, 독일 역시 결혼할 사이가 아니어도 파트너를 가족들과 자주 만나는 일이 흔하다고 했다. 프란지의 오빠는 IT 기업에 다니며 돈도 잘 벌고 여자 친구와 사이도 좋지만 결혼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로서는 사회적인 시선을 생각해서라도 결혼을 할 텐데 말이다. 프란지 역시 아프고 힘들 때 같이 있을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결혼이 필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현지 아저씨들과의 만남


프란지 역시 혼자 여행을 좋아하고, 현지의 새로운 사람들과 접하는 기회를 귀중하게 생각한다. 하루는 내가 사는 곳에 와서 우리 엄마도 만나고 같이 에버랜드에 가기로 했다. 우리 엄마는 영어를 거의 못하는데도 한국말로도 다 통한다며(자기들이 한국말 못해서 떨려야지 내가 영어 못해서 왜 떨려야 하냐는 스웩) 외국인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외국에서 사귄 친구들이 한국에 올 때마다 소개시켜 주곤 하는데, 벌써 미국, 스웨덴, 일본 그리고 이번에 독일인 친구까지 만나 영어 한 마디도 못하지만 글로벌한 아줌마가 되었다. 사실 주변 친구들에게 영어 할 기회를 주고 외국인 친구도 사귀면 좋을 것 같아서 소개해 주냐고 물어봐도 영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못 만나겠다고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막상 만나서 소통하는 게 언어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은데 두려움의 벽이 단단한 것이 안타까울 때가 많다. 프란지도 우리 엄마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고 엄마차로(나와 프란지 둘다 운전 면허가 없다) 에버랜드까지 가기로 했다.


프란지에게는 전날 우리 마을까지 오는 버스 편을 알려주었고, 어디서 내려서 9시까지 몇 번 출구 근처 투썸플레이스라는 카페로 오라고 알려주었다. 매주 목요일 아침마다 그 카페에서 엄마는 지역 실업인 모임에 참여하는데 내가 일어나서 준비하고 갈 때까지 프란지랑 엄마랑 둘이 먼저 만나기로 했다.


카페에 도착해서 보니 프란지가 우리 엄마, 그리고 10 명 정도 되는 아저씨들에 둘러 싸여 열심히 대화하고 있어 재미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업을 하는 CEO이거나 교수였는데, 독일 사회에 대해 궁금해 했고 독일 시장 진출에 흥미로워 이것 저것 묻고 있었다. 영어라고는 단어만 나열하며 한국어로 말 거는 우리엄마와 느리고 떠듬떠듬한 영어를 쏟아내는 여러 아저씨들의 호기심 어린 얼굴에 둘러 싸여 난감하지만 서서히 흥미롭게 적응해 나가는 프란지의 얼굴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엄마는 프란지가 언제 이렇게 한국 아저씨들하고 얘기할 기회가 있겠냐며 1시간 정도 더 모임에 머물러 있다가 에버랜드에 가자고 했다. 친절한 그 아저씨들은 헤어질 때 악수도 하고 명함도 주며 좋은 시간 보내라며 보내주었다. 멀리서 보면 자기들끼리 무슨 회의라도 하는 것 같던 유쾌한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독일인 친구의 인생 드라마


드라마 마지막 장면 기억나?
 여러분, 달이 참 아름답네요라는 글 말이야.


프란지의 인생 드라마는 로맨스는 별책부록이다. 아직도 긴 여운이 남는다며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라고 했다. 나 역시 요 근래 보기 드문 웰메이드 드라마라 생각해서 크게 공감이 갔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작가가 책을 많이 읽은 내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졌고, 출판업계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주연이 아니더라도 등장 인물 한 명 한 명의 인생이 보였고 현실감 있으면서도 드라마 답게 담겨져 있다. 자신의 스펙을 줄여서까지 일자리를 구해야 했던 경단녀 이야기, 시집을 내기 힘든 현실 등 생각할 거리들도 담고 있다.


프란지와 함께 교보문고를 둘러보다가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주인공들이 읽은 시집을 발견하고 알려주자, 이 책이 적어도 영어 버전이 있었다면 바로 샀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대신 나는 프란지에게 드라마 OST를 부른 잔나비라는 그룹을 알려주었고, 프란지는 경주행 KTX에서 계속 다시 듣기를 하고 있으리라.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읽으며 도쿄에 가고 싶어 하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읽으며 소설에 나온 모스크바와 뻬쩨르부르크 거리를 걸어보고 싶은 것처럼 외국인 관광객들 역시 한국의 드라마를 통해 로망을 키운다. 몇 년 전 다녀간 중국인 친구 역시 한국 드라마 광팬인데, 드라마 속에서 한강에서 치맥을 먹는 것을 보며 꼭 하고 싶다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속 그 장면을 가고 싶은 마음이 공감이 간다. 프란지는 김비서는 왜 그럴까와 그녀는 예뻤다라는 드라마를 정말 좋아한다는데 박서준에게 빠진 모양이다. 프란지에게는 그의 최애 드라마들이 한국 여행을 계획하도록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한국인들의 한국 살이, 직장 생활, 대학 생활 등 일상 속에서 걷는 거리와 먹는 음식, 만나는 친구들과의 대화, 평소의 생각과 감성이 자연스럽게 담겨 있는 좋은 글들이 번역되어 알려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브런치에도 이런 것들이 녹아 있는 좋은 글들이 많은데, 이런 글들을 선별해서 모아 번역가들과 협업해서 영어 에세이 판을 낸다면 한국 관광 산업과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나 역시 글을 영어로 써서 올리고 싶은데 마땅한 플랫폼도 없고 영어로 번역해서 올리기도 엄청난 노동이라서 엄두가 안 난다. 프란지가 이 얘기를 듣더니 너의 글과 생각이 자기들에게도 정말 흥미로울 것 같다며 영어로 쓴 글을 묶어서 아마존이나 그런 곳에 팔아도 좋을 것 같다고 주저하지 말고 시작하는 게 어떻냐고 했다. 내가 언젠가 장편 소설을 쓰고 싶다고, 지금보다는 여러 가지 더 수집하고 단단한 글을 쓸 수 있을 때 쓰고 싶다고 하니 여러 작가들도 초기 작품부터 완벽한 사람이 없다면서 완벽주의를 추구하기보다는 일단 시작하라고 동기 부여해주었다.


생각은 많지만 여전히 실행력은 없는 게으른 나는 프란지가 사다 준 태국 산 핀란드 머그컵에 아몬드 두유를 데워 차이티라떼를 만들어 마시는 중이다. 스웨덴의 한 카페 문을 열면 흠뻑 나던 시나몬 향이 생각난다. 이렇게 스웨덴, 태국, 핀란드, 독일, 한국의 여러 감성이 뒤섞여 이 컵에 마실 때마다 새로운 감정이 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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