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골목의 거리는 특색 있다. 길 가다 만난 파스텔톤, 회색, 벽돌색 등의 바랜 벽 색감이 큰 위안을 준다. 김해 여행을 하며 많은 영감을 얻었고, 혼자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감성을 오롯이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김해버스터미널에 내리면 신세계백화점이 있고, 밖을 나가면 경전철이 다닌다. 나스 홀리데이 컬렉션으로 나온 립스틱 패키지가 너무 예뻐 보이고 카르멘이라는 레드가 내가 찾아 헤매던 레드 색이어서 보려고 했는데 김해 신세계는 넓고 큼에도 나스가 없다. 버스터미널에서 창원으로 돌아가는 차 시간을 보니 18시, 18시 50분, 20시가 있는데 저녁도 먹고 20시 차를 타고 돌아가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내가 18시 차를 타고 돌아온 것은 날씨가 추운데 오래 걸어서이기도 하지만 창원으로 돌아가 롯데백화점에서 나스 립스틱을 사겠다는 의지의 작동 같았다. 내일 사도 되는데 말이야.
점심을 먹으러 먹고 싶은 메뉴를 네이버 지도에 쳤더니 15분 정도 걸으라고 나온다. 가는 길에 만난 수로왕릉 역. 역 이름이 수로왕릉이고, 길에 다니는 버스 뒤에는 가야라고 쓰여있으니 이 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여행 시작부터 설렜다.
며칠 전부터 초밥이 먹고 싶었는데 먹을 기회가 없었다. 점심에 동료들과 먹기에는 가격이 있고, 가끔 같이 저녁을 먹는 동기 중에 해산물을 못 먹는 동기가 있어서 메뉴 리스트에 항상 오르지 못하는 까닭이다. 혼자 밥을 먹을 때는 초밥 아니면 돈까스, 아니면 떡볶이를 먹는 편이다.
김해도서관을 지나 지도가 알려주는 길을 걷다 보니 응? 그냥 주택가 좁은 골목인데. 의아해서 더 걷다 보니 만난 식당은 주택을 개조 수준이 아닌 그냥 가정집에 식탁 놓고 밥 먹는 느낌의 장소였다. 가정식도 아닌 초밥집이라는 게 신기하면서도 독특하다. 아줌마의 인상도 푸근하고 친절하다. 먹고 싶었던 초밥을 시키니 장국과 샐러드, 그리고 간장새우 한 마리를 차려 놓고 간다. 간장새우 오랜만이야 맛있다. 초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공간을 둘러본다. 방 하나에 테이블 두 개인데, 옆 테이블에는 3살 정도의 남자아이를 둔 부부가 다 먹고 나갈 준비를 한다. 톤 다운된 연두색 잠바를 무릎까지 입고 파란색 니트 모자를 쓴 아기가 엄마가 쓰는 얕은 억양의 사투리를 계속 따라 말한다. 너는 모국어가 경상도 말이 되겠구나.
초밥이 나왔다. 기대만큼 실하고 크지 않았지만 한 끼 식사로 그래, 기분 좋게 먹자 하고 하나씩 음미하며 먹었다. 같은 가격의 서울대입구역 초밥집과 은행골 초밥의 질을 생각하니 아쉽긴 했다. 초밥을 한 개 남기고 있는데 아줌마가 미소 띤 채로 다가오며 하얀 새우튀김 두 개와 푸딩을 서비스라고 주고 갔다. 인심 푸근하다. 하얀색 푸딩은 몽글몽글한데 겉에 딸기잼이 둘러져 함께 먹으니 더욱 달달 고소했다. 요즘 마카롱에 빠졌는데 푸딩에 빠지고 싶다.
길가다 유적지가 나온다는 점은 경주랑 비슷하지만 수로왕릉을 가는 길은 여태까지 보지 못한 전경과 느낌이었다. 인위적으로 조성된 거리를 안 좋아하지만 신식 샵과 카페에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은 건 시골의 전경 속에 섞여 조화롭기 때문이다.
금관가야 1대 왕이라는 수로왕릉으로 가는 길. 삼국유사와 일련의 역사서를 기반으로만 가야사가 알려져 있어 다른 역사 연구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삶을 세세히 알 수 없어 아쉽다. 왕이라고 무덤으로, 역사의 한 시점으로 남아 후세대가 기억하니, 왕은 참 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저 무덤은 진짜 수로왕의 무덤은 맞는 걸까. 무덤을 가만히 쳐다보는데 찬 바람이 불었다. 언젠가 맞아본 것 같은 세기의 바람이었다. 무덤 주위로 소나무 숲이 둘러싸고 있고, 새가 떼를 지어 날고 있다. 1500년이 넘는 시간과 역사가 재빨리 흘러 지금의 내가 서서 무덤을 보고 있다. 시간과 죽음, 역사라는 것은 참 오묘하다. 조선시대, 그 전의 고려시대 사람들도 이 무덤을 서서 보았을까. 이 땅에서 흙을 밟으며 살던 사람들도 지금은 없다. 한참 생각을 하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옆에 아줌마가 수로왕릉에 합장을 하고 빌다가 간다.
버스터미널에서 내려서 우측으로 수로왕릉, 전통시장, 그리고 수로왕비릉, 국립김해박물관을 향해 위로 크게 한 바퀴 돌며 걷다 보면 스페인 지로나 데이트립을 갔을 때가 생각난다. 바르셀로나에서 기차를 타고 와서 좌하방에서 내린 후 우상방으로 마을을 크게 돌아 여행을 마무리했던 것이 비슷하고, 역사를 담은 곳의 분위기, 그날의 날씨도, 그때 입은 까만 코트와 크록스 신발, 포르투갈에서 산 코르크 가방을 지금 메고 있다는 점도 겨울 이베리아 여행을 느끼게 했다.
김해박물관 앞은 팽이치기, 널뛰기, 굴렁쇠 등 전통놀이를 체험하는 공간이 있어 어린이들이 많았다. 역시 역사 공부는 유적과 유물을 직접 보면서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김해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김해, 창원, 울산 등지의 유물을 순차적으로 구성하여 보여주는데 설명도 쉽고 충실하다. 국사책에 작게 실린 사진을 보며 어떤 유적지의 무엇을 무식하게 외우던 것을 직접 보니 느껴지는 것이 달랐다. 어린이와 학생들도 박물관에서 보면서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며 상상력을 확장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4-5세기에 금 귀걸이, 금반지라. 나보다 부자다. 국내외 악세사리 유물을 보면 지금 당장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 많다.
김해에는 글로벌 푸드타운이라는 골목이 있다. 동상시장과 이어지는 골목인데 이주민들이 많이 생겨난 것 같다. 식료품 점에 들어가면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라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이주민의 외양을 한 사람들이 더 많다. 식료품점을 구경하는데 인도네시아 소녀가 물어보길래 나는 나시고랭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민자들을 위한 것인지 핸드폰과 유심을 판매하는 곳도 많은데, 외국어로 쓰여있다. 식당은 그 나라 사람들이 직접 하는 것 같다. 태국 식당에 들어갔는데, 요리하는 사람도, 직원도, 손님도 모두 태국인 혹은 동남아 사람 같아 보였다. 나 혼자 한국인 외양의 한국어를 쓰는 사람인 듯했다. 팟타이를 먹은 지 오래되어 새우 팟타이를 시켰다. 테이블 위에 있는 땅콩 소스도 더 듬뿍 넣고 고춧가루도 아주 약간 첨가했다. 라오스 노점상에서 먹던 맛보단 덜하지만 프랜차이즈 식당에 비해 현지 맛에 가깝게 났다. 가격도 7천 원으로 저렴하고. 물은 파란색이 나는 차를 우린 물이 나온다.
너무 행복한 것은, 지나가다 러시아어로 쓰여있는 식료품점, 음식점이 많아 들어가 보니 내가 찾아 헤매던 유럽식 호밀빵을 판다. 러시아식 흘롑으로 물론 러시아, 유럽에서 먹는 식의 딱딱하고 더 까맣고 둥글고 시큼한 맛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아무리 찾아도 없던 식빵이라 무조건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칼로 쓱싹 잘라 치즈를 넣어 맛보니 원하던 흑색빵의 풍미가 살짝 느껴져 만족스러웠다. 지나가다 보면 나폴레옹 케이크와 여러 러시아 혹은 스탄 동유럽 지역의 디저트를 팔고 그곳 현지인인 듯한 외모를 가진 청년들이 빵을 굽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다음에 가면 디저트를 먹고 와야지.
러시아 빵을 파는 것 같아 들어가니 아저씨가
-Здравствуйте(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길래 나도
-Здравствуйте 했다. 그랬더니 러시아어로 길게 말했다. 대략적인 단어만 알아들어 не понимаю(못 알아 들어요)라고 하니 러시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는 즈드라스부이쩨만 유창했다. 한국 사람이에요. 여기 빵은 더 새까맣고 시큼한 건 없어요? Чёрный хлеб(쵸르늬 흘롑; 검은 빵).라고 하니 아저씨는 더 까만 빵은 다 팔렸다고 했다.
-러시아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난 러시아 사람인 줄 알았네.
-아 대학교에서요. 서울이요. 저 1월에 모스크바에 있었는데!
-서울에도 러시아 학교가 있는가. 러시아 어디에서 얼마나 살았어요
-아 학교는 한국 학교예요. 그냥 여행이요.
-아저씨는 한국 사람이에요?
-그래 동포지. 나는 우즈베키스탄.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는 조선 사람이지.
-오 그러시군요. 한국은 언제 오셨어요?
-7년 됐으. 어디 살아? 여기 살아?
-저는 창원이요.
-오, 내 친구도 창원에 있어.
아저씨는 떠듬떠듬 어눌하게 한국말로 말하고 나는 러시아 문장과 한국어 문장을 섞어서 말했다. 아저씨는 3대째 구소련 지역에 산 고려인이었다. 계산하면서 아저씨가 흘롑에 치즈랑 햄이랑 넣어서 먹지. 하니 그러려고 하는데, 여기 라씨스키 씌르(러시아 치즈)도 파나요? 하니 당연하지, 하며 냉장고로 안내한다. 우와, 러시아 치즈다. 가격도 5,500원으로 괜찮네. 그렇게 치즈와 함께 계산하고, 아저씨와 스몰톡을 마무리하고 또 오겠다며 나왔다.
다른 식료품 점을 가니 러시아에서 샀던 초콜렛도 팔았는데 한 3배 가격으로 팔았다. 나는 씨리얼 든 초콜렛을 정말 좋아하는데, 노란색으로 포장된 것이 씨리얼과 땅콩이 든 밀크 초콜렛이다. 내 꺼 하나 사고 김해 여행을 추천해 준 여자 동료 것도 하나 더 챙겼다. 항상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사랑스러운 동료인데 김해 지역 출장을 자주 갔다며 지도를 보여주며 갈 곳을 추천해주어 고마웠다. 롯데백화점에도 밀카가 있길래 선물로 주려고 산 적 있는데 씨리얼이 든 초콜렛을 파는 것을 못 봤다. 그러던 중에 여기서 만나다니 반가웠다.
글로벌 푸드 타운 별 거 없다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이 곳 감성이 정말 좋다. 이 곳 때문이라도 김해에 또 오고 싶고, 또 올 것이다. 친구에게 사진을 보내니 이태원보다 더 현지인이 많고 현지 감성인 것 같다고. 현지 식재료와 음식을 파는 사람들을 보니 내가 이방인이 된 것 같고 동남아, 중앙아시아로 여행 온 기분이 든다. 인도 네팔 식당, 우즈베키스탄, 캄보디아, 베트남, 모로코 식당 등 다양한 현지 감성의 식당을 가보려고! 요즘 책을 너무 못 읽어서 감성과 영감이 부족하던 차에 행복한 충전이었다. 김해 너무 매력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