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멀리 탁상시계는 13시 몇 분을 나타내고 있다. 순간 여기가 어딘가 낯설었다. 너무 깊이 잠들었나. 일어날 힘과 의욕 없이 눈을 뜨는 게 최선인양 방을 둘러보았다. 햇빛을 가리려고 집주인이 붙여놓은 창문 위의 누리끼리한 신문지에 쓰여있는 ‘갑갑한 경남, 숨통 틔우려면 미세먼지 촘촘한 측정부터’라는 기사가 눈에 띈다. 창원은 미세먼지가 상당히 좋은 편인데 말이야.
날이 따뜻하고 보일러도 잘 키고 생활하고 있어서 집에서 가져왔는데 별로 신을 일 없는 두툼한 회색-핑크색 조합의 수면 양말이 바닥에 뒹굴고 있고, 곧 생리가 다가와서 꺼내놓은 생리대 두 상자가 방구석에 처박혀있다. 직구로 구매하니 반년 치를 한 번에 사는 편인데, 요새 환율은 딱히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데다 생리대가 똑 떨어져 그냥 주문했다. 무해하지 않은 생리대중에 가장 착용감이 편한 Oi는 나의 인생 생리대로 쟁여놓았는데 이제는 안 파는지 구하기 어려워졌다. 얇아서 썩 내키진 않지만 나트라케어와 스웨덴 생리대인 나티를 주문했는데, 진한 핑크색의 나트라케어 상자와 그 옆에 널브러진 수면양말의 색깔 조화가 좋다.
휴가를 내서 목요일 밤에 올라가서 토요일 밤 12시,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프리미엄 버스를 타고 새벽 4시쯤 창원에 도착했다. 그래서 오늘은 새벽 5시부터 꿀맛처럼 자고 난 일요일 오후. 서울은 추웠고, 내려올 짐을 배낭에 짊어지고 친구들을 만나며 돌아다니느라 몸은 고됬다. 무언갈 먹어야겠다 싶어 배달의 민족 앱을 켰다.
어제는 12시부터 친구 셋을 연달아 만난 뒤 저녁에는 친구와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 20명과 용산의 파티 공간을 빌려 연말 파티를 했다. 하루동안 만나면서 20분 간 정말 얼굴만 본 친구도 있고, 거의 3년 만에 만나는 친구도 있었고, 약속 시간이 떠서 급번개로 만난 친구도 있었다. 힙지로라는 을지로, 대학로, 한남동, 이태원, 동빙고동을 걷고 윗 지방에서 생활하는 친구들을 만나니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지 하는 왠지 모를 소속감과 위안을 느끼면서도 현지인 친구를 만난 것 같은 여행자의 느낌도 들었다.
“일은 좀 재밌어?”
“재미를 포기하니 재미있어졌어.”
“우와, 그 말 좀 적어놔도 돼?” 핸드폰 메모를 켜며 내가 말했다. 친구는 대기업에 입사한 뒤 돈은 많이 받지만 일의 보람과 재미는 없다고 말했다. 메시지로는 이직을 하고 싶다던 친구가 직장에 계속 다닐 모양이다.
“그냥 열심히 돈만 버는 거지 뭐, 좋은 일은 니가 많이 하잖아. 그럼 되는 거지.” 주문한 삼선짜장 소스를 내게 덜어주며 친구가 말했다. 나는 일도 너무 재미있고 적성에도 맞고 보람도 크다. 그러다 보니 별로 힘 안 들이고 괜찮은 보수를 받는 꿀직장에 다니는 느낌이다. 친구가 받을 예정인 300% 성과급은 부럽지만 내 팔자에는 없을 액수라 생각하니 진정으로 부러움은 없는 것 같다.
같이 공부할 때 중국집 같이 자주 갔는데, 하고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친구를 너무 오랜만에 만나 신기하고 반가워 나 혼자 계속 호들갑을 떨었다. 친구는 남자인데 차분하고, 심지어 너무 로봇 같은 친구이다. 삐리삐리. 여자 둘이서는 짜장면은 먹으러 잘 안 가는데 말이야.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 근황을 물으니 다들 취업을 잘했다는 소식을 들어 기뻤다. 실력은 인정하지만 여기저기 이간질하며 남을 괴롭히는 성격 이상한 아이가 유명한 기관에 취업했다는 소식에 좀 씁쓸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어스름하고 후미진 밤 골목을 걷다 나타난 어떤 문을 열고 지하로 들어가니 나타난 우리의 크리스마스 파티 공간은 방탈출 게임의 세트 같은 느낌이었다. 사과와 귤을 넣어 끓인 뱅쇼의 맛은 매우 어설펐지만 와인과 빵, 치즈, 신뢰할 수 있는 친구의 친구들과의 스몰톡이 새로운 영감이 되었다. 한 국가기관에 취업하게 되었다는 사람에게 그 기관 경남지사도 우리 회사와 엄청 가깝다고, 창원 정말 좋다고, 언제 한번 돌아야 한다면 창원에 오라고 말했더니 솔깃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서울 사람만 만나면 창원 홍보대사가 되는 것 같다. 창원의 단점을 말하라면 말할 게 생각이 안 난다.
오랜만에 서울에 가서 시간을 밀도 있게 쓰며 참 들떴었다. 니가 연예인이냐 왜 이리 얼굴 보기가 힘드냐, 밴타고 이동하냐. 시간이 없어 보지 못한 친구들도 많아 아쉽지만 만나고 온 친구들에게 충분히 에너지를 받고 왔다. 네다섯 시간 떨어진 나의 과거의 공간에서는 나 없이 시간이 흐르고 있었고, 나도 경상도로 돌아와 잠잠히 다시 나의 시간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