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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Mar 23. 2020

신음하는 이웃과 고통을 분담하는 내가 되기를

날이 좋아 산책길에 나섰다. 한 발자국 거리여도 그림자 속은 쌀쌀하고 또 햇살로 나가면 몸이 따뜻해지는 게 우리가 해로부터 얻는 혜택과 영향이 엄청남을 실감한다.


우리 회사 근처는 대학병원이 있는데, 오늘은 병원 근처 산책길로 향했다. 베이지색이라고 하기는 뭐하고 인디핑크색이 섞인, 코트보다 얇은 바바리를 입었다. 마침 주머니가 있어 회사 출입증을 집어넣었다. 횡단보도 건너편에 타 부서 직원이 하얀색 니트 롱스커트를 입고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꾸벅 인사했다. 신호등이 파랗게 켜지고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그분은 이어폰을 빼면서 다가왔다. 머리에 가려서 보이지 않겠지만 한쪽에 무선 이어폰을 꽂고 있어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렸다. 어디 가냐는 거겠지 싶어, “산책가요.”라고 말했다.


산책길의 시작은 흙으로 된 약간 경사진 언덕이다. 나무판자와 노끈 같은 두툼한 손잡이들을 따라 올라가니 앞사람의 바지와 발이 보였다. 대학병원 가운을 입은 여자 두 명이었다. 얼룩덜룩 지저분해 보여서 그런지 청바지는 더 제멋대로 찢어져 보였고 뒷굽이 닳은 삼선 슬리퍼는 묵직하고 헐거워 보였다.

대충 묶은 머리와 꼬깃꼬깃하고 조금 바래 크림색 느낌이 나는 가운 속의 의료진들은 바쁜 현업에서 잠시 벗어나 조금이나마 인간다운 삶을 위해 햇빛을 쐬러 나온 듯했다.


얕지만 구두를 신은 나는 자갈길이 아닌 깨끗하게 포장된 길로 가고 싶었다. 그들과 멀어지면서 나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핑크색 블라우스 리본을 매고 빳빳하게 다려진, 허리가 짤록 들어가 새침한 에이라인 스커트를 입고 있다. 고상한 척 옷을 입고 책상에 앉아 일을 하다 밥을 먹고 여유 있게 햇빛을 쐬러 나왔다. 지나가다 개나리가 폈네, 하고 사진을 찍고 햇빛을 충분하게 받고 있는 돌벽과 가로수가 조화로워 사진을 찍었다. 봄볕이라고 눈이 시리네, 다음부턴 선글라스를 가지고 다녀야겠다, 하면서.


나도, 우리 회사도, 우리 회사 직원들은 상대적으로 코로나 무풍지대 안에 있다. 내가 대중교통 대신 한 시간씩 걸어 다니는 것(그것도 운동삼아), 주말마다 집에 있기에 답답한 것은 푸념 거리가 못된다. 그렇다고, 코로나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고 불편을 덜 느낀다고 해서 죄책감이나 마음의 짐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때와 자리에 맞는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순간의 소중함을 즐기면 된다.



전 세계적인 전염병은 국가 간에 공고화되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상호의존의 고리를 하나씩 끊고 있다. 그리고 폐해라고까지 느껴질 만큼 큰 상호의존의 단점을 하나씩 공개하고 있다. 결국엔 홉스식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민낯이 드러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얼굴이 잠시 파래지면서도 왠지 결말을 맞춘 것 같아 기분 찝찝한 미소를 혼자서 짓는다.


내가 걱정하고 싶은 사람들은 코로나로 직접 아파하는 사람들 이면에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경제 침체로 인하여 피해 입고 있는 우리 주위의 이웃들이다. 이들은 로힝야나 시리아와 같은 헤드라인으로 도배되는 난민 사태로 세계적 관심과 후원이 그곳으로 집중될 때 여전히 길거리에서 오들거리며 세계와 싸우고 있는 빈민 아동들과 같다. 실직자들, 실직을 눈앞에 둔 사람들,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데 갑작스러운 적자로 임대료와 직원들 줄 월급이 밀리게 될 것이 뻔한 사람들, 알바 자리도 없이 기약 없이 일정만 기다리는 취업준비생들, 목소리를 내어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는, 혹은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 말이다.


얼마 전까지 나는 최저임금도 받아봤고 나라에서 주는 실업급여를 모아서 한 달에 20-30만 원만 쓰며 취업을 준비했던 사회초년생이다. 미래가 불안한 청년들에게 이 외로운 대기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질지 조금은 알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월급이 깎이지도 자리를 비워달라는 요구도 없는 지금의 상태에 부모님은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냐고 하신다.


나는 연 이자가 5%까지나 되는 학자금이 아직도 많이 남았고 저축된 돈도 없다. 물려받을 재산도 없다. 어머니는 암 치료가 끝난 지 일 년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도 일을 하고 계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우리 가정은 기회가 될 때마다 사회에 기쁜 마음으로 돌려주고 싶다. 나는 사회에게 받은 것이 과분하게 많기 때문이며, 나의 울타리가 되어준 사회에게 사회적 책임을 다할 인재에게 바람직하게 투자한 것이라는 뿌듯함을 안겨주기 위해서다.


또 우리는 욕구와 저축을 잠깐 미루어도 자리와 월급이 보전되지 않는가. 나는 적어도 다음 달에도, 또 그 후에도 계속해서 급여가 들어올 것이다. 심지어 아파서 쉬게 돼도 얼마 간 걱정 없이 월급이 나온다. 이웃인지 뭔지를 위해 나의 욕구, 소비, 가족의 삶의 질에서 조금도 손해 보기 싫은 가정에게는 상호의존의 어두운 그림자가 들이닥칠 수 있다.


막막하여 좌절한 이웃에게 기쁜 마음으로 지갑을 열어보자. 기부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도처에 있다. 가령 절약하느라 맛있는 밥도 못 먹고 대기만 하고 있는, 우울감에 빠져있는 취준생 친구와 맛있는 밥을 먹고 책값으로 쓰기 좋은 상품권을 선물해도 좋다. 당신이 열심히 일해서 번 소중한 얼마로 인해 비로소 삶에 숨구멍이 생기고 희망을 느낄 누군가를 발견할 재미를 느껴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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