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네 Oct 25. 2020

연보라색 하늘로 뒤덮인 섬의 달밤

환기미술관

@환기미술관 담벼락

버스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게 지루해서 어느 순간 지나가는 차종을 보기 시작했다. 평소 지나가는 차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가 갑자기 차에 집중해서 보니 재미가 생겼다. 현대, 현대, 벤츠. BMW, 폭스바겐, 현대. 벤츠, 벤츠, 폭스바겐. 와 처음 보는 슈퍼카다. 노란색 슈퍼카가 신기해서 그 차가 지나가 꽁무니가 보일 때까지 시선을 따라갔지만 결국 무슨 차인지 모르겠다. 와, 외제차가 정말 많네. 이 자리를 지나가는 차의 반은 외제차야.  


퇴근길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얼른 뒤편의 두 번째 칸 남은 자리에 앉았다. 연보라색 안경을 쓴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하차 태그 근처의 봉을 야무지게 잡고 무표정하게 서서 간다. 혼자 마을버스를 타고 열심히 다니는 어린이들을 보면 너무 야무져 보여서 귀엽다.


버스에 내려서 밤길을 걷는데 깨끗하고 선선하고 쨍한 공기와 함께 뜬금없이 오므라이스 냄새가 들어왔다. 기분 좋은 냄새였다. 깜깜했는데 갑자기 갈색 조명이 비친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에너지가 들끓었다. 계속 맡고 싶었지만 나는 잠시 멈출  계속 걸었다. 에너지는 점차 사라졌다. 후리스의 계절이다.

@환기미술관

예전에 현대미술관에서인지 김환기의 그림을 보고 반했었다. 그 크고 푸르른 직사각형 네모가 온 공간을 압도했다. 김환기의 공간에 들어서자 거대한 직사각형의 그림, 그 속의 각기 다른 파랑, 연파랑, 회색기 섞인 파랑, 연보라, 터키색, 청록색, 피색, 버건디색, 쨍한 자주색, 연핑크색, 촌스러운 쨍한 핑크색 등이 압도했다. 갑갑해서 옷을 벗었다. 공간을 꽉 채운 각기 다른 점들, 통일성이 있으면서도 전부다 다른 점들, 점들이 이룬 선과 면, 동심원과 파동이 가득했다. 돔 형태의 동심원은 밑에서 보면 유럽의 한 성당의 돔을 밑에서 우러러보는 느낌이 들었다. 유럽 성당의 한가운데로 순간 이동한 것 같았다. 밑에서 보니 점점 퍼져나가는 원형은, 멀리서 보면 점이 안 보이고 그냥 얼룩덜룩한 청색으로 희미했다.


"이 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점을 찍으며 화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수묵화를 그릴 때 보니 한 점 한 점, 한 선 한 선 그리는 게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이 점들은 의도와 우연을 같이 담은 것이겠죠? 이 화가는 어떤 철학을 가진 사람일까요?"


"그러게요. 온통 점으로 가득한데, 점에 대한 집착이 상당하네요." 같이 그림을 보러 간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손을 턱으로 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 생각엔, 밑에서 본 그림들에서 나온 점들이 2층의 그림에서는 클로즈업해서 확대한 것 같네요. 이렇게 4차로 같은 그림들 봐보세요. 자기 그림 속을 확대한 것 같아요. 점이 다 다른데, 세포 같기도 하고. 색은 오히려 중요한 것 같지가 않아요, 저는. 이 점들을 변주하기 위해 다른 색깔을 취한 것뿐."


"그래요? 저는 색깔을 좋아하고 색감을 중시하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색감이 하나하나 다 다른 것도 인상깊게 봤어요." 내가 말했다.


"여기 글 좀 보세요. 무수한 별, 그리고 사람. 이 분은 이 점들을 무수한 별로 본 것 같아요. 무수한 별이 곧 사람이고, 인연이라고 본 것 같은데요. 예전에 그런 말이 있잖아요 유명한 사람이 운명을 다하면 별이 진다고. 이 점들이 곧 별이고 사람인 것 같아요." 김환기가 쓴 시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시종일관 진지한 사람이다.


"와, 여기 베이지색 정말 예뻐요. 그 옆에 버건디 색으로 그리다니. 정말 세련된 것 같아요. 우아해요!.

우와! 여기 귤색 위에 쨍한 자주색 문양 좀 보세요! 와.. 상아색 위에 터키색을 올리니까 작품이 맑고 경쾌해지네요."

나는 그림을 볼 때 색감, 그리고 색깔들 사이의 조화로움에 희열을 느끼는 편이라면, 같이 간 사람처럼 그 작품의 의미가 무엇일까, 작가의 생각이 무엇일까를 파헤치며 보는 사람이 있다. 관점이 다르지만 서로 감상을 나누면서 예술을 즐기는 마음이 풍부해진다. 예술작품을 앞에 두고 마스크 밖으로 말과 생각이 조심스럽게 퍼지는 장면 역시 예술이 된다.


내 작품은 공간의 세계란다.
환기미술관에서 산 엽서

김환기라는 작가는 파리와 뉴욕에서 유학을 하였고, 1960년대, 그리고 1970년대 초반까지 왕성하게 그림을 그린 것 같다. 우리 부모님 세대인 그때, 먹고살기도 힘든 전후에 그림에만 몰두하기는 정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직사각형 면에 자신 있게 이 그림을 그리기로 결정하고 완성된 작품은 서울에 남아있고, 서울에 있는 2020년 10월의 내가 감상하고 있다. 2020년 매일매일의 일상을 살기 바쁘고 예술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우리를 1960년대의 작품이 붙잡는다. 생각을 하게 하고 느끼게 한다.


자연은 영감이 된다. 김환기에게도 자연은 영감이 되었다. 그가 사랑한 강산, 조국, 그리고 서울은 그에게 영감이자 그리움, 애틋함의 대상이었다. 그가 몰두하여 표현해 낸, 그에게 그렇게도 소중한 예술과 서울은 우리 곁에 남아있다.


<매화와 항아리>라는 그의 작품은 한국적 추상미술의 정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사람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그 선과 곡선, 배치, 색깔은 한국과 서양미술의 아름다운 조화다. <섬의 달밤>이라는 그림은 내가 제일 매혹된 작품이다. 다른 그림들과 달리 색깔이 계속 두껍게 얹혀 질감이 도톰하고도 자유로워 보였다. 연한 자주 핑크색의 삼각형 나무, 피 색깔 가득한 바닥, 회색 산, 연보라색과 회색끼 섞인 하늘색이 우중충하지도 않은 밝은 밤이 표현된 듯 색감이 주는 압도감과 명랑함, 희열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어떤 섬을 가서 영감을 받았고, 그림을 그리기로 결정했을까? 달밤이라면서 어떻게 이런 색감을 구상했을까.

@부암동 담쟁이


가을색으로 변한 담쟁이들은 화려하지만 바스락바스락 말라가서 쓸쓸하다. 내 영혼은 가을에 묻힌 채 영혼 없이 둥둥 떠서 서울을 걷는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멍하고 무기력하다. 사랑도 둥둥 상실도 둥둥. 껍데기만 둥둥 떠다닌다. 몸과 마음이 지친다. 힘도 없고 무기력하다. 멀리서 나를 본다면 어쩔 수 없이 걷는 것 같다. 아주 가느다란 행복의 끈을 잡고 햇빛을 쐬러 나온다.  

-너는 불행함에 빠져 불행함을 즐기며 사는 사람같애.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하면 되잖아. 왜 행복을 발로 차고 그래? 니 눈은 너무 슬퍼 보여. 왜 그렇게 살아?



아주 오랜만에 스웨터를 꺼내 입었다. 무려 17년 전에 산 스웨터. 홍콩으로 여행 갔다 온 친구 엄마가 사다준 BCBG 스웨터. 유행이 지났다며 매번 서랍 속에만 갇혀있다가 빈티지가 되었다. 갑자기 알록달록한 이 스웨터가 사랑스러워 보인다.


영화 <유니콘 스토어>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꿈을 꾸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AI, 과학자보다 가치 절하되어서는 안 된다. 솔직하게는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성과주의, 결과주의, 로봇 같은 일처리 속에서 빛나는 것이 사람만이 하는 생각이고 상황판단력이다. 로봇에게 대체될 수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알고보면 성실한 과정을 통해 쌓은 ‘소중한’ 생각임에도 입밖으로 나와서 공개된 이상 그 생각을 손쉽게 도출한 것으로,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것으로 치부하고 그 생각을 해낸 사람이 무언가를 얻는다면 마치 운이 좋거나 불로소득을 얻는 것처럼 치부하는 것은 정말 저급하다. 생각마저 귀찮은 시대, 그러면서 생각의 고리와 도출을 날름 집어 가져다가 쓴 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유니콘 스토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유니콘 덕후로 살았다. 미술을 전공하지만 허황된 꿈처럼 되어버렸고, 현실과 타협해 회사에서 복사를 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화려하고 예쁜 두툼한 초대장을 하나 받는다. 유니콘 스토어로 향하는 초대장이다. 스페이스바를 눌러 영화를 멈추었다. 문득 고심 고심하여 성의 있는 아기자기한 초대장을 만들어서 작은 파티를 열고 싶다는 상상을 시작했다. 나도 유니콘이 있다고 믿고 싶고, 믿을 것이다. 다른 세계로 여행을 가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설 한 권과 루이보스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