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네 Dec 09. 2020

내 인생에도 무지개가 뜰 거야

D.H. 로렌스 <무지개>

어슐라는 약혼자 안톤 스트라빈스키와 파혼했다. 군인이었던 안톤은 어슐라에게 인도에 가서 같이 살자고 청혼했었다. 원래 안톤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결혼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역할을 부여받는 것이기에 부담이 있었다. 그러나 어슐라에 대한 사랑이 너무 뜨거웠고 어슐라가 없는 삶은 무기력하고 영혼이 죽어 있었다. 어슐라와 결혼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되겠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계산은 전혀 없었다. 내 인생에서 이 여자를 꼭 붙잡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직감 뿐.


어슐라도 안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느꼈다. 안톤의 균형잡힌 몸과 외모에 매료되었고 원하는대로 행동하며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점, 세련된 자신만의 분위기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다른 여자가 그에게 반할까 봐 질투도 났다. 서로가 본능적으로 뜨겁게 끌렸다. 같이 있는 시간에 큰 행복감을 느꼈고 소중했다. 그의 품이 좋았다. 다만 주체적인 삶, 자신이 지향하는 삶, 가치관 등에서 안톤과 생각이 다름을 느꼈다. 그의 생각이 이해가 안되었다. 안톤과 함께하는 삶을 본능적으로 너무 원하지만 그와 동시에 안톤과 결혼하게 되면 자아를 실현하지 못할 것이라 단정했다.


안톤과 결혼하기로 한다는 것은 그를 따라 인도에 간다는 걸 의미하는 걸 알면서도, 또 자신은 인도에 가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면서도 어슐라는 그의 청혼에 응했다. 그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자기는 결국 그와 결혼하게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 결혼해서 남편을 따라 인도에 갈 미래의 남작 부인으로서의 시선과 감흥을 잠깐이나마 즐겼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 확실하고 이 사람이 아니면 앞으로 그 누구와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와 결혼하는 게 과연 맞는 걸까? 하고 고민이 되었다. 그와의 결혼은 교사가 되어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고 싶은 평소 지향점과 다르게 느껴졌다. 주위에서는 그를 사랑하면 당연히 결혼해야 한다고 너 바보 아니냐며 그 사람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고 기회도 없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어슐라가 결혼 승낙을 망설이고 결혼 안 할래요,라고 해버리자 안톤은 아이처럼 눈물을 줄줄 쏟았다. 눈만 봐도 눈물이 터지는 안톤에게 어슐라는 진정으로 가슴 짠했다.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 안톤이 귀엽고 사랑스러웠겠지. 어찌저찌해서 결혼하기로 하고 에메랄드 반지도 받았다. 안톤과 함께 동산에 올라가 은빛이 쏟아지는 밤하늘과 자연에 파묻혀 아름답고 환상적인 추억도 쌓았다.


방어기제였을까. 어슐라는 결국 결혼하지 않겠다는 시그널을 보냈고, 어슐라의 표정과 행동에서 안톤은 느꼈다.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행복한 미소를 짓던 어슐라는 기계적이고 싸늘하게 변한다. 안톤은 둘의 사이가 끝났음을 느끼고 바로 돌아선다. 안톤은 어슐라와의 사랑을 다 소진해버린 것 같다. 헤어지고도 어슐라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어슐라 없는 삶이 두려웠다.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 잘 지내던 대령의 딸에게 청혼을 한다. 잠시 다른 여자와 약혼까지 했지만 너와 결혼하고 싶다고. 안톤은 2주 만에 후다닥 결혼까지 올리고 인도로 떠난다. 그 여자와 그렇게 빨리 결혼을 해버리는 안톤의 마음은 어떤 걸까. 평소 결혼에 대한 생각도 회의적이었던 그가 어슐라와 헤어지자마자 다른 여자와 급하게 결혼을 하고 떠났다.


그와 헤어진 후 어슐라는 흐물흐물하고 의욕 없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아기가 생겼다는 기운을 느낀다. 그는 떠났지만 아기가 생긴 것에 기쁘고 감사하다. 사랑하던 남자, 안톤의 아기인 게 좋다. 과거의 추억으로서 안톤이 좋다. 어슐라는 아기를 매개체로 그와 연결되어 있다. 문득 자아를 추구하던 삶과 자신의 선택이 이기적이었고 추하다는 생각에 괴롭다. 아기만 일곱여덟 명째 줄줄이 낳으며 사는 어머니의 모습이 동물 같아서 한심해 보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어머니의 삶이 숭고하고 가치 있으며, 그녀가 옳고 진리이며 자신이 틀리다고 까지 생각한다. 육체를 추구하는 삶, 사랑을 주고받으며 가정을 꾸려 생명을 낳아 기르는 일이 열렬히 하고 싶어졌다. 인도에 가 있는 안톤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사랑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당신의 아기를 가졌고, 자신과 아이를 받아달라고.


인도에서 짧은 답장이 온다. "결혼했음."

편지를 간절히 기다리던 어슐라는 분노와 경멸감을 느낀다. 어슐라의 마음이 어떨지 공감이 간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결혼해달라고 순수하게 애원하던 눈빛의 그가, 평생 같이 살자고 약속한 남자가 금방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같이 살고 있다니. 자신의 사랑이 부정당한 것 같고 배신감이 들 것이다. 아, 그 사람은 그렇게도 여자를 만나고 싶구나. 내가 아니어도 되는구나. 나는 금방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나는 그 정도구나. 결국 사랑은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고 평생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마음도 나의 착각일 수 있다는 것. 상대방의 그런 착각에 속아 나의 뜻과 다른 인생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을까, 속는 것이었어도 같이 살았어야 되는 걸까. 거봐, 나 아니면 안 되는 거 아니잖아. 결국 다른 여자 만나 결혼하잖아. 나는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나를 벌써 다 잊고 그 여인과 가정을 이루고 살잖아.


어슐라는 기분전환을 위해 숲에 간다. 숲의 건강한 에너지를 듬뿍 받는다. 그러다가 말들에게 쫓긴다. 도망치며 몸을 숨긴다. 집으로 돌아온 어슐라의 몸과 마음이 쇠약해졌다. 한동안 앓던 어슐라는 아기를 잃는다. 유산해서 마음이 아프다기보다는 편해진다. 밖을 내다본다. 탄광촌과 마을, 건물과 사람들은 기계적이고 가식 같다. 영혼이 없어 보인다. 죽은 것 같다. 그러다 문득 하늘을 본다. 둥글게 무지개가 떠있다. 몽롱하게 힘없던 어슐라에게도 활력이 생긴 기분이다. 긍정적인 에너지로 기운이 샘솟는다. 무지개가 죽은 도시 같이 우울한 마을을 환히 비추는 것처럼 어슐라 자신도 왠지 모르게 밝을 것 같은 자신의 미래에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이 차오른다. 어슐라의 앞으로의 인생과 사랑을 응원한다.


어슐라는 이제 서서히 잠다운 잠을 자기 시작했다. 영혼으로 새로운 세계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키며 잠을 잤다. 그 평화는 참으로 깊고도 풍요로웠다. 어슐라는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점차로 성장에 몰두하게 되었다.


어슐라는 느꼈을거야. 자아와 사랑을 분리할 수 없다는 걸. 사랑이 내 인생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온몸으로 거부했지만 결국엔 그 사랑을 통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밀한 '자아'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랑은 소중한 것이고 다른 것을 희생해가면서 얻는 사랑의 가치는 존중할만한 것. 내가 한 선택은 되돌릴 수 없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사랑의 힘. 사랑의 가치. 세상을 구할 반짝반짝한 사랑의 에너지.

매거진의 이전글 연보라색 하늘로 뒤덮인 섬의 달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