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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Nov 22. 2020

나를 다시 찾고 싶어

내 침대의 왼쪽 벽에는 여행하면서 미술관이나 고서점에서 산 오래된 엽서, 그리고 사진 몇 개가 걸려있다. 스물여섯 살 때인가, 싱가폴을 여행하면서 생전 처음 좋은 호텔에서 삼단 트레이라고 하는 애프터눈 티 세트를 먹으며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두 개. 당시 초딩이었던 사촌동생이 자신의 폴라로이드로 찍어준 사진이 보인다. 내 물건을 가지고 싶다고 해서 그에게 준, 그가 차에 가지고 다니던 내 사진. 그리고 헤어지는 날 차에서 내가 다시 가져온 사진.


그와 나는 미성숙한 사람들이었다. 지기를 싫어하는 남자와 이기적으로 배려를 바라는 여자. 서로를 조금도 참지 못하고 "그럼 헤어지면 되겠네, "라는 말을 쉽게 하고 그러다 갈등과 분노가 증폭되어 차단하고 연락을 끊다가 다시 만나고. 서로에게 용서될 수 없는 상처를 주면서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가느다란 실로 계속 이어져 있는 것 같은 사이. 결국엔 이별하고 한 달 넘게 '진짜로' 헤어진 사람들처럼 지내고 있다. 헤어지고 나서도 한동안 인스타그램 친구로서 서로의 스토리를 보며 지냈었다. "나는 이렇게 아파서 울고 있는데, 너는 친구를 만나고 놀러 다녀?" 하고 그의 분노만 자극했다. 연락은 안 하면서 내가 스토리를 올리면 칼같이 읽어. 어느 순간 그가 내 스토리를 읽나 안 읽나 들어가서 보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내가 그의 옷소매 끝 조금을 움켜쥐고 대롱대롱 매달려 안 놓아주는 형국인 것 같다는 생각에 결국 차단을 눌렀다.

 

"이제 괜찮은 척은 할 수 있어"

퇴근하고 넷플릭스를 보고, 9-10시만 되면 잠들고. 주말에도 노트북 불빛 하나 켜져있는 채로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았다. <엘리노어 릭비: 그남자 그여자> 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보았다. 이별에 대응하는 남녀의 삶, 생각, 그리고 감정이 잘 그려져 있다. 엘리노어를 맡은 제시카 차스테인이라는 배우의 변화하는 헤어와 메이크업. 짙고 그윽한 스모키 메이크업이 예뻐 나도 정말 오랜만에 조금 짙은 아이 메이크업을 하고 다녔다.

"I can't picture his face anymore(그의 얼굴이 생각이 안 나)." 멍한 채로 침대에 누워있는 엘리노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보려 심리학 강의도 수강하러 다니지만 마음은 나아지지 않는다. 나도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떠올리려고 해도 얼굴이 생각이 안 나.


불을 끈 채로 침대에 옆으로 누워 내 프로필 사진을 한 장씩 거슬러 올라가며 넘겼다. 올해의 나. 작년의 나. 재작년의 나.. 매년, 매 계절 다른 장소와 다른 생각, 다른 감정의 나를 보았다. 더 자유롭고 활기차고 생각도 행동도 통통 튀던 나. 직장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점점 나를 잃는 것 같다. 얼마 전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새로 온 시간제 직원이 인턴 기간에 핫팬츠를 입고 와서 경악했고, 그 사람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왜 직장에서 핫팬츠를 입고 있는 게 부적절한지를 돌려 돌려 설명했다. 그러나 그 스물한 살의 인턴은 왜 핫팬츠를 입는 것이 문제가 되냐며 납득할 생각이 없었고, 꿈속의 나는 답답해서 암에 걸릴 것만 같았다.


다음날 회사에 와서 이 얘기를 했더니 옆 자리 과장님이, "그 사람이 대리님 자신이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회사 생활에 찌들어 초심을 잃어 가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이게 왜 안돼? 그게 왜?라고 사소한 것에도 의문을 가지던 내가 순응적으로 주어진 일을 그냥 하고 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던 차에 과거의 나, 다양한 생각과 꿈을 가지고 있던 그때의 나를 사진을 통해 보면서 다시 나를 찾고 싶었다. 순간적으로 의욕이 생기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어 졌다.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가슴 뛰는 일을 찾아서 무언가 작은 일이라도 다시 해보자.

주말에 누워만 있다가 노트북을 덮고 옷을 갈아입었다. 책 한 권과 영감 노트, 경남에서 친했던 동료가 준 정말 부드럽게 잘 나오는 삼색 볼펜 하나를 들고 서점 카페로 향했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에서 봐 두던 서점 카페. 서울의 힙한 골목에 있을 법한 카페가 동네에도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연초록색 선인장이 높게 뻗어있다. 청록색 벽으로 칠해진 인테리어가 금색 전등과 조화롭다. 재채기가 나왔는데 확진자가 200명이 넘는다는 뉴스가 떠올라 민망했다. 마스크의 코를 한 번 누르며 괜히 잘 쓰고 했다는 시늉을 했다. Jazzy 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읽고 싶은 괜찮은 책이 꽤 있던 곳. 독서실마냥 조용한데 다양한 사람이 저마다의 예술 활동을 하고 있었다. 오른편에는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왼편에는 노트북으로 ppt를 만들고 있었다.

찰떡 아이스 맛이라길래 시켜 본 쑥 라떼

나는 요즘 빠져 있는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두툼한 장편 소설 <사랑에 빠진 여인들>의 2/3 정도의 페이지를 펼쳐 한 줄 한 줄 읽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라는 그의 장편 소설이 너무 좋았어서 <무지개 2> 편까지 읽고 있는데, 알고 보니 <사랑의 빠진 여인들>에 나오는 어슐라와 구드룬이 <무지개>에 나오는 브랑윈 가족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었다.

-탁 트인 길에서 그가 조용히 그녀를 껴안고 서 있는 순간, 그 순간은 평화, 그야말로 오로지 평화였다.
그의 영혼은 강인하고 편안했다.

-그의 마음은 달콤하게 편안했다. 어딘가 새로운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삶이 그를 관통하여 흘렀고,

-그녀 영혼 속에서 새로운 눈이 떠졌고,
서로의 존재에 대한 기쁨에, 생각할 수 없고, 알 수조차 없는 순수한 존재에 대한 기쁨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천국 가득한 풍요의 느낌에 압도되었다.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


제럴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구드룬이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어서 마음의 행복감과 평화를 느끼고 있고, 그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체감하며 설레는 시작을 하고 있었다. 기쁘다.

비가 한 차례 오기 전, 아직 막 떨어진 낙엽들에는 화려한 생기가 남아 있다. 바람이 불자 갈대들이 단체로 한 방향으로 누우며 휘잉하고 마른 소리를 냈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바람이 분다. 작년 이맘때가 생각이 났다. 창원으로 발령이 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었다. 아파트 담에는 마른 담쟁이가, 창문을 열면 마른 주황색의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짧은 해만큼이나 어둡고 우울했다.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책 한 권을 누비자 앞 바구니에 넣고 가로수길로 달렸다. 가로수길로 향하는 길은 은행나무로 가득한 오르막길이었다. 청록색과 다홍색이 그라데이션된 표지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있었다. 주민센터 앞의 누비자 주차장에 자전거를 대고 걷다가 느낌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차 한 잔에 마카롱이나 브라우니 하나를 시켜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여유를 가졌다.


또다시 생일을 맞았다. 한 살을 더 먹었다. 친구들과 동료들이 모바일 쿠폰과 선물을 보내주었다. 록시땅 핸드크림은 카카오톡 선물 코너의 맨 위에 있어서 그런지 세 개째. 순식간에 핸드크림만 6개가 생겼다. 나를 위해 몰스킨에서 나온 프리다 칼로 한정판 노트를 하나 주문했다. 사고 싶었는데 비싸서 주저하다가 노란색은 이미 품절되었고, 결국 사기로 마음 먹고 남은 핑크색을 주문했는데 마음에 든다. 맞아, 나는 노트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행복하다. 아직 쓰고 있는 노트들을 다 쓴 뒤 내년에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책과 새로운 영감을 가득 담아 열심히 써봐야지. 기대된다. 새로운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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