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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Dec 16. 2020

세상이 온통 깜깜해지기 직전

실제는 더 아름다워요!


5시 55분쯤. 산등성이를 따라 주황색으로 진하게 물든, 위로는 짙은 남색으로 그라데이션 되어있는 하늘을 내다보았다. 달은 아주 가느다랗고 아슬아슬한 얇기로 떠있어 얌체같다. 공기는 앱이 알려준대로 깨끗하다. 좋다. 마스크를 내리고 신선한 공기를 흠뻑 마셔본다.

"와, 정말 아름답다." 감탄하며 핸드폰을 꺼낸다. 핸드폰은 도저히 내 눈이 보는 아름다운 색감과 분위기를 담아내지 못한다. 아쉽다. 역시 비대면보다는 대면이야!


자연의 색감은 신비롭다. 예기치 않은 풍성한 감정을 가져다준다. 일상을 환기시켜 준다.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지대가 높은 이곳에서 먼 곳까지 내다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두루두루 곳곳을 보느라 눈이 모자란다.  <왕좌의 게임> 같은 드라마에서 성에 사는 왕비가 창문을 열고 다스리는 지역을 멀리 내다보는 것처럼, 어느 시대 어느 공주가 된 것 같다. 저 불빛의 공간 하나하나에 백성들이 살고 있겠구나. 저 많은 사람들을 모두 다스리기란 머리가 아프겠구나. 저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삶은 어떨까. 말이 없다. 조용하다. 모파상의 소설  <여자의 일생>에 나오는 잔느처럼 여러 몽상에 빠진다. 공기가 차갑고 높고 넓게 뻥 뚫린 하늘을 보니 북극에서 보던 하늘과 그때의 공간, 같이 있던 사람이 떠오르기도 한다.


퇴근길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새로 오신 기사님이다. 도로교통공단에서 매우 좋아할 정석 운전을 보여 주신다. 너무너무 느리다. 노인, 어린이 보호구역 30km 구간이 너무 길게 느껴진다. 다른 구간에서도 너무나 조심조심 안전운전을 하신다. 답답하다. 지금 운전면허를 보고 계신 것 같다. 휴. 창밖을 내다본다. 6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벌써 깜깜 어둡다. 어젯밤에 우유에 갈아 먹고 잔 고-소한 아보카도와 바나나가 생각난다. 아보카도 바나나. 뭔가 상상력을 불어일으키는 어감.


오늘은 에어컨을 교체하러 오신 설치기사 두 분과 하루 종일 한 공간에 있었다. 답답한지 마스크를 내리고 작업하는데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우 더워, 하면서 끙끙 대며 설치하는데 차마 마스크 좀 써주세요,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예의도 바르고 열심이셨다. 나는 말없이 공기청정기를 살균모드로 세게 틀었다. 코로나는 감기 정도 수준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절대 걸리고 싶지는 않고, 동선도 나도 절대로 공개되고 싶지가 않고. 코로나가 뭔지 마스크는 왜 써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한 치매노인이 요양센터를 다니다 확진이 되었고, 병실도 긴급 돌봄도 이용할 수 없어 취준생인 손녀가 확진자 할머니를 한 집에서 돌보고 있다는 주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인스타그램에 아는 동생이 코로나로 결국 운영하던 화실을 한 달간 접는다는 글을 올렸다. 자영업자, 프리랜서의 어려움이 어떨지, 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도 지원서를 쓰며 기다림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취업준비생들의 절실함이 어떨지도 어느 정도 가늠이 간다.


우연히 조직도를 보다가 올해 내내 운영을 하지 않게 된 사내 수영장의 안전요원 두 명이 근무 중으로 떠있는 것을 보았다. 이 분들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걸까. 수영장을 거진 일 년간 닫아놔도 월급이 나가는 모양이다. 실제로 매일 나오는지, 나와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지 어쩐지 본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궁금하다. 재택근무 중으로 뜨지도 않는다. 월급이 많진 않겠지만 이래서 공공기관에 다니나 보다. 자리보전에는 짱이다. 미리 확보된 예산에서 운영되는 공공기관의 특성상 나는 월급도, 근무시간도, 받는 복지에도 타격이 없다. 올해에도 100명 정도 되는 신입직원이 들어왔다. 경쟁률은 작년보다 1.5배 이상이었다.


밖에서는 현재에 전전긍긍하는 시간에 나는 미래를 고민하고 있다. 60세 정년이 지나면 나가야 하는데, 60세는 한창인데, 그때 퇴직하면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까. 며칠 전부터 은퇴 후의 삶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물론 당장에 갚아야 하는 학자금 대출과 부진한 저축을 보면 현재도 밝지는 않다. 의식주 중에 '의'와 '식'은 충분히 누리고 있는 것 같은데 '주'를 얻는 것은 영 딴 세상 이야기다. 솟구치는 부동산 거품에 결혼을 포기 또는 지연하고 있는 주변 또래의 청년들, 이런 와중에도 결혼한 사람, 임신한 사람, 결혼할 사람도 간간히 있다.


그냥 난 어제 산 밤색 코듀로이 배기바지가 좋다. 코듀로이는 무슨. 골덴바지다. 딤섬처럼 핏도 예쁘고 편하고 따뜻하다. 내일 날씨를 보며 내일은 뭘 입을까 고민한다. 어제오늘 아침에는 장갑을 껴도 손이 시리던데, 내일은 그래도 덜 춥겠네. 오전에 주문한 만년필 배송이 시작되었다는 카톡이 왔다. 몽당연필처럼 생긴 하얀색 카웨코. 아쉽게도 버건디색이 품절이었다. 책을 읽고 노트에 감명 깊은 문장을 써놓는 것을 좋아하는데 요즘 글씨 쓰는 게 좋다. 예전에 공부할 때 같이 공부하던 오빠는 매번 잉크 만년필을 썼는데. 승목 오빠의 알아보기 힘든, 힘없이 꾸불꾸불 귀엽게 기어가는 글씨체가 생각난다. 처음 써보는 만년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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