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네 Nov 30. 2020

추워요

공기청정기를 껐다. 구멍이 뻥뻥 뚫린 하얀색 공기청정기가 아직 공기가 '좋음'은 아니라는 초록색 불을 켜고 있는데도 껐다. 공기청정기 대신 작은 찜질용 매트의 코드를 꽂기 위해서다. "얘, 너 발이 왜 이리 차니." 어제 내 발바닥을 만지고 가던 엄마가 물었던 게 생각났다. "나 수족냉증." 장난으로 말했다. "젊은 애가 무슨 수족냉증이니." 하며 엄마가 자기 배에 덮고 있던 매트를 양보하며 발에 대라고 주었다. 나는 손발이 차다. 시린 발을 매트로 감싸고 누우면 정말 따뜻하다. 공기 중에는 엄마가 해놓고 간 오징어볶음의 불향이 떠다닌다. 환기를 위해 열어 놓은 창문도 추워서 닫았다. 몸에 안 좋을 것 같지만 따스한 지금이 좋다.


세안을 하고 크림을 바르려고 거울을 봤더니 양볼에 있던 붉은 여드름 자국이 많이 옅어졌다. 여드름이 점점 들어가고 있는 게 느껴져서 기분이 좋다. 한 해 동안 꾸준히 바른 에스티로더 나이트 리페어와 나이트 크림. 갈색병을 1+1으로 팔던 때를 우연히 만나 같이 구경하던 엄마가 이럴 때 써보지 언제 써보겠어, 하고 사라고 부추겨 50ml 두 병으로 한 동안 계속 써왔다. 그리고 올리브영을 갔다가 피부 장벽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쓰여있어서 산 바이오더마 인텐시브 밤, 클렌징 폼도 비누도 다 떨어져 산 독도 어쩌구 쓰여있는 클렌징 폼. 평소처럼 클렌징 오일로 화장을 녹인 뒤 독도 클렌징 폼으로 지우고 나면 각질 제거와 함께 피부에 막이 생긴 것처럼 보들보들해져서 왠지 이것 덕이라는 느낌이 든다. 오랫동안 성인 여드름으로 고생하고 있는 친구에게도 이 클렌징 폼을 추천한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사실 피부는 내부적인 것의 영향도 크게 받을 것 같아서 화장품 때문인지, 꾸준히 먹기 시작한 비타민 덕분인지 10시-7시 수면습관 덕분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요즘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는 스타벅스 블랙 초콜릿 케이크. 진한 초콜릿 크림에 견과류도 들어있다. 이 케이크 하나를 사려고 12,800원짜리 모바일 쿠폰을 쓰려니 금액 맞추기가 난감하다. 엄마가 좋아하는 스콘을 하나 추가하니 여전히 금액이 부족하고, 퇴근시간 얼마 남지 않은 조각 케이크 중에서 클라우드 치즈케이크 하나를 추가한다. 어제는 <특종: 량첸살인기>라는 영화를 틀어놓고 뜨거운 물을 끓였다. 레몬 에키네시아 티백 하나를 꺼내 컵에 준비했다. 포크로 치즈 케이크 앞을 잘라 한 입 먹는데 우웩, 생각보다 너무 맛이 없다. 옆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엄마에게 "엄마, 먹을래?" 하고 계속 권유하지만 뜨개질 유튜브에 집중하고 있는 엄마는 답이 없다. 산 게 아까워 두 입정도 더 먹다가 집어넣었다. 조정석이라는 배우가 나오는데 무서워서 막 도망치는 장면이 너무 웃겨서 소리 내서 깔깔거렸다. 정말 재미있고 몰입된다. 대중에게 소비되는 기사와 사건들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주제를 던지기도 한다.


라트비아에 사는 친구에게 메시지가 왔다. "생일 축하해. 늦어서 미안. 어떻게 지내고 있어?" 얼마 전에 결혼하여 성이 K 어쩌구로 바뀐 리에나다. 페이스북에 뜨는 친구의 성이 달라져서 어색하다. 결혼 생활은 어떻냐고 물었다. 남편이 좋은 사람 같았다. 곧 아기도 가지고 싶다고 했다. 세계 어디나 코로나 상황은 심각한 것 같다. 라트비아는 추우니까 더 그럴까. 나보고 재택근무를 하냐고 물었다. 자기는 재택근무를 하지는 못한다고. 유치원 교사여서 더 그럴 것 같다. 라트비아의 겨울을 떠올리니 지난 금요일 퇴근길에 자전거를 타고 온 것이 생각났다. 얼굴이 너무 차가워서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친구와 얘기를 나누니 더욱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따뜻한 나라든 추운 나라든 좋다. 여행을 할 때는 그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아이템을 발견해서 사 오는 것을 좋아한다. 상점들 하나하나 다 들어가서 구경하면서 느낌 있는 문구가 적힌 긴팔 티셔츠를 사고 싶다. 일상에서는 볼 수 없는 색다른 배경 속에 들어 있는 나의 사진을 간직하고 싶다.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싶다. 마트에서 장을 봐서 그 나라의 식재료로 요리를 해 먹고 싶다. 새로운 냄새를 맡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이 온통 깜깜해지기 직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