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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Aug 31. 2020

멋있다, 매미의 일생

삐요스 삐요스 뺘아-

창문을 조금 열어 놓았을 뿐인데 주변의 산과 나무에서 매미들이 떼로 합창을 하던 금요일. 각자 고유한 소리들이 합쳐져 쨍-하며 한 목소리로 퍼져 나간다. 저렇게 쩌렁쩌렁하게 우는 매미소리가 가을이 되면 왜 다 사라지냐고 동료에게 묻자, 동료는 초딩시절 3년 동안 곤충채집의 대가로서 활동했던 일화를 말하며 어떻게 매미의 삶을 몰라요? 하고 황당해했다. 회사에서 매미의 일생이 궁금해서 계속 찾아봤다고 엄마에게 말하니 초딩들한테 물어보면 그런 건 줄줄 읊는다며 나보고 초등학교 때 안배웠냐며 초등학교 나온 게 맞냐고 물었다. 아, 저렇게 온 힘을 다해서 엄청난 구애를 펼치는 거구나. 대단하다 매미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기 전 그 사이의 따뜻한 시기에는 공기는 무겁고 색은 부드럽고 저녁은 가짜로 꾸민 영광처럼 감각적인 빛깔을 띤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저녁에 산책을 나오면 가을이 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오늘은 매미소리도 현저히 작아졌다. 아직 싸늘하지는 않은, 약간 더 차가워지고 선선해진 공기가 몸에 감기고 달짝지근한 풀냄새가 공기 중에 온통 맴돈다. 냄새를 계속 맡고 싶어 코를 계속 킁킁거리며 걷는다. 캠프파이어하는 타는 냄새 같기도 하고 밤이 익은 냄새 같기도 하고 스위트 팝콘 냄새 같기도 하다. 더운 여름에 밤공기는 선선하던 산책길 라오스 냄새도 생각난다. 초롱초롱 뾰로롱 벌레가 속삭이며 운다. 지나가던 크림색 진돗개는 풀밭을 호기심 있게 걸으며 귀엽게도 풀을 뜯어먹는다.



어느 순간 사무실에는 나 혼자 남았다.
내 의식의 어느 한구석에서 넉넉한 안도감이 느껴졌고, 양쪽 폐가 한층 깊은숨을 내쉬고 있었다.

대체로 사람들로 가득하고 소란스러운 곳, 또는 자기 집이 아닌 장소에서 혼자 있게 되는 시간, 이때가 바로 우연한 만남과 부재가 불러일으키는 흥미로운 감정을 경험할 기회다.

온전히 혼자라니, 얼마나 좋은가!

즐거운 고독!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오늘은 모처럼 사무실에 혼자 있게 된 날. 휴양지에서 입었던 발목까지 오는 진홍색 나시 원피스에 까만 가디건을 두르고 유령처럼 유유히 다녔다. 주말 사이 더위에 인스턴트커피는 바짝 말라 끔찍하게 굳어있었다. 뜨거운 물을 컵에 붓고 멜번 브렉퍼스트 찻잎을 차망에 넣고 담갔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찻잎이 망 밖으로 다 떨어졌다. 으유,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내일 운전면허 도로 주행 시험이 있어 운전학원에서 준 인쇄된 코스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내가 내일 도로 주행 시험을 본다고 하니 한 남자 동기가 자기도 긴장됐던 순간을 얘기했다. 장내에서 10킬로 안팎의 속도로만 달리다가 갑자기 고속도로를 나가게 돼서 당황스러웠다는 얘기. 겨울이라 너무 추워서 목장갑을 끼고 트럭을 몰았다며, 옆에서 강사는 계속 말을 걸지 고속도로는 무섭지, 온통 혼이 나갔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너무 웃음이 났다.


창원에서 장내 기능 실격 한 번, 불합격 한 번의 역사가 있는 나는 도로주행도 미루고 미뤘다. 그러다 이번 주말에는 마음먹고 연수를 받으러 갔다. 봄에 읽은 단편 소설 장류진의 <연수> 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너무 긴장하지 말아야지, 결국엔 긴장하지 않고 강사에게 맡기고 나면 실력이 향상되어 있을 거야, 하고 마음먹었다. 학원 기계에 카드를 긁고 지문을 찍은 뒤 시간을 기다렸다. 옆 의자에 앉은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남자 친구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연수를 받고 온 여자에게 아이스커피를 건넸고, 여자는 빨때꼬쟈죠~하고 애교를 피웠다. 애교에 녹은 남자는 싱글벙글 행복해 보였다. 관광지에서 만날 수 있는 무난하게 행복해 보이는 커플처럼 보였다.


"000 학생, " 하고 제 시간이 되어 내 이름을 부르는 강사는 할아버지였다. 강사와 함께 노란색 차까지 이동하면서 나는 장내기능도 떨어졌을 만큼 하나도 못한다, 너무 긴장된다라고 말했다. 엄마가 아침에 나를 보내면서 아주 잘 부탁드린다고 꾸벅 인사해,라고 놀렸던 게 생각났다. 70대 라는 할아버지는 너무나 여유 있게, 전혀 걱정하지 마라, 장내랑 도로는 다르다, 그냥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하며 운전석으로 향했다. 조수석으로 향한 나에게 “손 내미시고,” 하면서 입고 있던 조끼 포켓에서 자그마한 스프레이형 손소독제를 꺼내 내 손에 앞뒤로 뿌린 후 연습 장소로 이동했다.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낀 할아버지는 주먹을 쥐고 무릎에 놓고 핸들을 잡은 뒤 좌석을 알맞게 당기라고 했다. 엑셀과 브레이크의 위치도 잊어버려 헷갈린 나는 P에 놓고 브레이크를 밟으라는 말에 액셀을 밟았지만 할아버지는 당황하지 않고 알려주었다. "자,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고, 출발." 네? 그냥 이렇게 가는 거라고요?


액셀을 서서히 밟았다. 장내기능을 배울 때 처음이라 액셀과 브레이크를 과감하게 퍽퍽 밟다가 혼났던 게 생각났다. 운전 강사였던 선글라스 낀 아줌마가 뒷목을 잡으며 "꺽지 마라고!" 하고 소리쳤다. 얼마 전 공터 주차장에서 엄마 차로 연습하면서 살짝살짝 밟는 연습을 한 게 도움이 되었다. 와 내가 60킬로 속도로 달리고 있잖아? 어느새 나는 좌회전도 하고, 지하도로도 통과하고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말이 없던 할아버지는 금융기관에서 30년 일하다 은퇴한 후 강사 시험을 봐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부터, 자녀가 어디서 일하는지, 코로나 얘기부터 요즘 나라 사정이 어떤지 끊임없이 말하기 시작하셨다. 내가 잘 들어주니 더 신이 나서 말씀하셨다. 목장갑 끼고 도로 주행 연수를 받았다던 동기가 강사의 말에 응대까지 해야 해서 온통 정신이 없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아, 이런 거구나.


유턴을 할 때 내가 액셀을 너무 길게 밟는다고 한번 살짝 뗐다가 그 힘으로 돌아서 3차선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설명해주셨다. 유턴을 열심히 연습했다. 뒤에 차도 없는데 깜빡이를 켜고 한 걸음 한 걸음 왼쪽 차선으로 움직이는 뼝아리 차를 모니 차들이 알아서 비켜갔고, 인자하게 끼어주었다. 은퇴하고 자식들을 다 키우고서 제2의 인생을 찾아 성실히 일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존경스러웠다. 노인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참 멋있다.


점심을 먹고 따뜻하게 우린 홍차를 마시면서 인스타그램을 켰다. 네덜란드로 온 가족이 이민 가 지금은 암스테르담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는 알바니아인 친구가 올린 스토리를 읽는다. 에르미따쥐 암스테르담 전이 열렸나 보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화려한 장신구와 드레스, 그림 속 여인들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의복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쌍뜨 뻬쩨르부르크에 가서 에르미따쥐를 구경하고 싶다. 러시아 미술관, 문학 투어를 다니고 싶다.


코로나로 인해 연극, 오페라, 전시 등을 ('어쩔 수 없이'라는 측면이 크지만) 온라인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넓어지고 있다. 며칠 전 가디언지에 기고한 한 장애인의 글을 읽었다. 코로나로 인해 대다수가 집에 있게 되자 온라인으로 즐길 수 있는 컨텐츠가 다양해졌고, 이로 인해 코로나와 상관없이 이전부터 장애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이들에게도 문화예술 등을 향유할 기회가 넓어졌다는 것. 소수일 때는 보이지 않았던 불편이 다수일 때 비로소 주목을 받아 불편이 개선된다는 현실이 씁쓸하면서도 어쨌든 전염병 확산으로 인한 긍정적인 측면이 하나라도 있다는 발견. 우리가 보고 깨닫지 못하는, 장애로 인한 불편이 얼마나 더 많을까 하는 생각. 뉴노멀 현상이 어디까지, 어떻게 우리 삶 속으로 파고들지 그 변형과 변주가 걱정스럽지만 일견 기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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