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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May 23. 2021

네 뒷모습은 서정적이야

버스 맨 뒷자리, 한 자리 남은 곳에 앉았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 몇 가닥이 들어왔다. 시원하고 소중하다. 까만색 반팔 니트 원피스가 땀에 달라붙었다. 내가 이 옷을 입고 나오자 옷을 사러 온 매장 손님이 어머 너무 예쁘다, 마네킹에 걸려있는 거보다 예쁘네, 하니 흐뭇해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그 옷. 어느새 뜨거워진 햇살과 공기. 창밖으로 보이는 돌담길은 생소하다. 창 밖 풍경은 겨울과 봄을 지나 어느새 푸르러졌다. 모든 어둠도 오해도 두려움도 저 폭풍 속에 빨려 들어가고 영화처럼 푸르른 자연만 남았다. 순진무구하게. 아기를 잃은 아빠의 울부짖음과 뜨거운 눈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음소거되어 사라졌다가 허공에서 갑자기 증폭된 듯한 그런 풍경과 갑작스러운 더위. 새들의 명랑한 짹짹거림.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 내 마음을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슬픔으로 채웠다. 그 풍경들 어디에 슬픔을 부추기는 요소가 숨어 있는지.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석가탄신일을 껴서 평일에 이틀 연차를 내어 보낸 소중한 5일. 모든 여행 계획을 무산시킨 대차게 내린 비는 의외로 원망스럽지 않다. 나는 비를 좋아하니까. 휴식은 너무나 중요하다. 나른하게 누워서 쉬고, <마드리드 모던걸>을 보고, <방랑자들>도 읽다가 나가서 예쁜 옷을 사며 기분 전환을 하고, 그레이 색 선글라스도 엄청난 세일 가격에 사고, 친구들도 만나고, 미술관도 가고, 박물관도 가고, 뮤지컬도 보고, 풍경을 보며 생각도 하고 여러 영감을 받았다.


엄마가 조르지오 아르마니 립스틱을 기프티콘으로 받았다. 어, 나 할래! 레드립 매니아라면서 아르마니 레드 립스틱은 처음이다. 나 이거 술탄 레드 할래!

쨍한 오렌지 레드가 아닌, 아주 딥한 톤 다운된 오렌지색, 딥하지만 갈색 느낌은 아니고 오렌지색이 명랑하게 살아있으면서 딥한 레드도 살짝 섞여 뻔한 오렌지가 아닌 그런 오묘하고 특별한 색. 한동안 이 색만 발라야지, 너무 행복해!



“사랑이 없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어요. 그런 세계는 창밖을 지나가는 바람과 똑같아요.”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슬픔의 무거운 감정이 흐른다. 기쁘고 행복한 순간 속 기저에 깔린 우울함, 추억. 크림색 캔버스에 아주아주 짙은 검녹색을 가득 칠하고 싶다. 꾹꾹 눌러서 두툼한 질감으로.


시간을 자주 보낸 추억의 공간에 오니 기분이 이상하다. 여기는 이 사람과도 왔었고, 이 사람과도 왔었는데 그 사람들은 없고 나 혼자 이 공간에 있다. 기쁨, 그리움, 외로움, 기대, 포기, 놓아버림, 즐거움, 지침, 의욕, 설렘, 슬픔 등 여러 감정을 겪었던 이 곳. 오랜만에 와서 좋은 마음만 들 줄 알았는데 너무 낯설고 이상하다.


당신은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인간의 마음과 여러 추악한, 그러나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의 욕망.

‘당신은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물음.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쉽게, 많이 소비되고 있지만 우리는 정말로 사랑을 해본 적 있는가, 사랑의 아름다움, 그 고귀한 가치를 진심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해본 적이 없으면서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사랑해야 한다고 나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있지는 않나?


그리고 정말로 악마는 우리 마음속의 아름다움과 싸우는 것일지 모른다. 인간의 욕망, 사랑, 아름다움, 그리고 죽음에 대한 사유로 이끄는 예술의 가치. 그리고 뜨겁게 불타는 배우의 열연. 그 아름다움.



그럼 내 뒷모습 좀 찍어봐ㅎㅎ


“네 뒷모습은 서정적이야.”

“응?”

“음.. 그냥 매번 느낀 건데, 한.. 고독 이십, 근심 걱정 이십, 멍 때리는 느낌 삼십? 그리고 너만의 고유한 아우라 삼십이야.” 투닥거림 없는 잔잔한 동갑친구가 이렇게 내 뒷모습을 묘사하는 동안 나는 넋이 나갔다. 너무 오랜만에 연락하고 만나자고 해도, 나를 단편적으로 알지 않는 너무 고마운 관찰이자 감상이어서, 예술적이고 아름다워서.

“우와! 되게 멋있다. 그 말 좀 써놔도 돼?”


온전히 나를 궁금해하고 섬세하게 신경 써주고 내가 이상한 앞뒤 없는 얘기를 나도 왜 이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 채로 줄줄 말해도 잘 들어주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대화 중에 논쟁할 일이나 생각의 충돌이 없어 편안하고 이해심과 배려심이 많아 많이 어려 보이는 외모와 얼핏 대조적으로 성숙함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같이 있으면 크림색의 면이 점점 짙어져 쨍하지만 마음 편해지는 색감의 파란색으로, 끝이 둥근 적당한 두께의 선이 되어 여러 갈래로 퍼져 이어지는 것 같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알료샤처럼, <백치>의 미쉬킨 같은 그 존재 자체로 주변에 위로와 따뜻함을 주는 사람.


“너 뭐 좋아해? 다음에는 밥 먹자.”

“음, 인도요리도 좋아하고 동남아 요리도 좋아하구, 음.. 돈까스도 좋아해!” 나는 돈까스를 좋아한다.

“어, 다음에 돈까스 먹자. 동대입구 쪽에 맛있는데 알아.”

“오, 진짜? 어떻게 맛있는데? 그래! 그러자. 다음에 내가 주말에 올게.”

“응. 최대한 돈까스 먹지 말구 있어.” 하는 재밌는 말도, 대화가 주는 영감도 남긴채.

청계산에서

“부장님, 저 휴가 쓰고 쉬니까 너무 좋았어요. 친구도 만나고, 쉬고, 에너지를 듬뿍 얻었어요!” 엊그제 부장님 하고 둘이 쌀국수를 먹으며 말했다.

“어유 그럼. 맞아요. 좀 쉬면 너무 좋지.”


사람들은 불편해하지만 나는 부장님과 둘이 밥도 먹으러 나가는 막내 대리. 여러 사람들이 부장님에게 불만도 있지만 나는 부장님이 내 얘기를 오해 없이 잘 들어주고 공감해줘서 좋다. 나에게는 좋은 부장님이다. 직위로 찍어 누르는 기미가 전혀 없고, 느껴지지 않으며 합리적이다. 중심이 잘 서 있는 오픈 마인드형 상사라고 느낀다.


가령, 부장님과 산책길에 조직 문화나 조금 부당한 관행인 것 같은 것에 대해 가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우, 그런 일이 있어요? 맞아요, 그런 건 좀 고쳐야 돼요, 하면서 자기 선에서 개선할 수 있으면 개선하려고 마음을 먹거나 아니면 이런 의견을 전달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블라인드 같은 데는 귀 막고 일을 후배들에게 미루고 부당한 일을 시키는 상사들만 등장하지만 내 주변에는 좋은 동료들이 많다. 조직문화는 서로서로 노력하여 개선해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소통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은 쉬어가며 일해야 숨통이 트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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