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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Sep 20. 2021

사랑스럽고 애처로운

언젠가는 죽게 되는 인간

리스본의 한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땀이 나서 입고 간 얇은 코트를 벗었다. 1월인데 따뜻했다. 트램 타는 돈이 아까워 페소아 박물관까지 걸어가는 길이었다. 핸드폰을 켜서 구글맵으로 수시로 확인을 하며 길을 찾아갔다. 지도에서는 걸어서 25분 정도라고 했는데 엄청난 오르막일 줄 몰랐다. 노란색, 파란색 알록달록한 무늬를 한 집들과 문 색깔에 멈춰서 사진도 찍고, 내가 돌아온 길도 잠깐 서서 바라보았다. 색색깔의 집들이 촘촘히 있었다. 낡은 건물과 이리저리 구불구불한 길이 아름다웠다.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미래의 내가 방에 누워, 혹은 길을 걷다 이 순간이 떠오를 거라고. 방에 누워 보르헤스의 단편집 <알레프>를 읽고 있던 나는, 정확히 말하면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청년이 아르헨티나 몬테비데오의 거리를 정처 없이 방황하고, ‘파소 델 몰리노’라는 어느 술집 겸 가게에서 일어나는 싸움판을 묘사한 부분을 읽다가 왜인지 모르게 갑자기 리스본 거리를 걷고 있던 나를 떠올렸다. 그때 리스본 곳곳을 걷던 나는 지금 이 손, 이팔을 가진 내가 맞나? 내가 열 몇시간 비행기를 타고 시간을 거슬러 갔었단 말인가?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그 공간 속의 내가 너무 생소하다. 그 언덕을 걸으며 공원도 지나치고, 더워서 옷을 벗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낯설고 재밌어하며, 그러면서도 이 길이 맞나, 하며 약간 긴장해 허둥지둥하는 내 모습을 공중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드론으로 찍은 것처럼 사방팔방에서 바라보는 입체적인 영상으로 떠오른다.


어 나 포르투갈하고 스페인에서 열흘 정도 여행을 했어,라고 문장으로만 남은 것만 같아 아쉽다. 문장이 너무 쉽게 말해져서 별로이다. 돌아오는 날 바르셀로나 호텔에서 캐리어에 짐을 낑낑대며 싸고 고생을 했는데. 사실 이 정도 고생은 고생 축에도 못 끼지만.  


<오징어 게임>을 몰아서 다 봤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으로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나도 목숨을 걸면서까지 그런 게임을 하게 될까? 목숨을 걸고 400억 원을 탄 최후의 생존자가 된들,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내가 없는 시간 동안 외롭게 나를 그리워하다 죽어버렸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돈을 벌려고 발버둥 쳤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서 생사를 헤매는 동안 옆에 있어주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알레프>의 첫 단편 <죽지 않는 사람> 속에서 묘사된, 무분별하고 복잡하고 기이한 건물들로 가득한 도시의 모습을 읽으며 왜인지 오징어 게임 속 핑크색 하늘색의 크고 규칙적인 계단 장면이 떠올랐다. 규칙과 불규칙이라는, 매치되지 않아야 하는 것임에도.


백신을 맞으려고 공가를 냈는데 오전에 회사를 나가야 했다. 내 담당업무는 아니지만 나의 일손이 필요했다. 갑작스레 생긴 일이어서 담당자인 차장님이 밥을 사주며 부탁을 했다. 왠지 모르게 회사에 나오게 될 것 같아 오후로 예약하긴 했던 터라 너무 쉽게 알겠다고 괜찮다고 말하니 굉장히 조직친화적이라며 머쓱해하면서도 백신 공가 날 나오게 된 것을 유감스러워했다. 밥을 얻어먹으면서는 차장님 때문에 회사 나오게 돼서 스트레스받아서 백신 맞고 잘못되는 거 아니겠죠?라는 농담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10시 반에 끝나서 정리하고 열한 시에 퇴근하니 조퇴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긴 추석 연휴가 기다리고 있었다. 백신을 맞고 뇌출혈이 왔다는 20대 여자에 관한 뉴스가 생각났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네, 아쉬움이 없었다. 아주 아주 적은 확률이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이참에 타의에 의해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신을 맞고 팔이 뻐근한 것 말고는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혀에 난 입병이 아파서, 그리고 치과 갔다 오니 입안이 불편해서 씹기가 힘든 스트레스가 더 크다. 한쪽 턱이 부었다. 일 년 전쯤 앞니가 점점 벌어져 치과에 갔더니 절망적이게도 일 년 간 재교정을 해야한다고 했다. 20대 초반에 만난 담당 의사는 30대 중반을 향하는 나에게 아직도 어린아이 대하듯 반말을 하는데 아무렇지 않아보인다. (이름을 부르며) 니가 결정해야 돼, 아저씨 쪽 보고 입 벌려봐, 라고 한다든지. 친근하긴한데 민망하다.


쇼핑도 하고 책도 읽고 누워서 뒹굴뒹굴 쉬고 날씨도 선선하니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아 좋다. 어제는 달이 약간 불안정하긴 하지만 둥그레졌던데 오늘 달은 어떠려나. 너무 안 움직인 것 같아 다리를 구부린 채 올렸다 내렸다 하니 배에 힘이 약간 들어간다. 이 정도면 조금이라도 운동은 되었으려나, 하고 뻔뻔하게도 누가 들으면 코웃음칠 생각을 해본다.


대체공휴일을 이용해 토일월 대구 여행을 가려고 이것저것 알아보았다. 수창맨숀인가 대구예술발전소인가, 하는 전시가 괜찮아 보이는 감각적인 곳들이 있어 예약을 했다. 대구는 예술의 도시일까? 요즘 대구가 매력적이게 느껴져서 대구 근무를 신청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두가 말린다. “저번에 창원 발령났을 때 엄청 울었다면서요.” 라고 하거나, 지역색이 강하다며, 텃새가 심하다며. 요즘엔 퇴근하고 여행하듯 살고 싶어 비연고지에 가고싶다. 막상 지방(이라고 수도권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에 살아보니 재밌고 좋아서.


코로나 때문에 전시 예약을 해야 한다니 계획적이게 된다. 숙소도 예약하고 가는 열차도 예약하니 기분이 한갓지다. 퇴사했지만 친했던 동갑 직원과, 그리고 창원에서 일하는 친한 동료 한 명과 각각 만날 날짜를 정했다. 기분이 좋다.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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