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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Sep 08. 2021

미혼부가 되고 싶어

“대리님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줄까요?”

6시 반. 퇴근을 준비하던 동료가 지하철역까지 가는데 탈 거냐고 물었다.

“좋죠.”

주차장에서 차를 얻어 타고 정문을 나서는데 운전자 창문을 통해 보니 다른 부서 여자 차장 두 명이 어디까지 가냐고 묻고 있었다. 지하철역 쪽으로 간다고 하니 바로 올라탔다.


음악이 나왔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인가에 나오는 노래인지 자연스레 슬기로운 의사생활 얘기로 넘어갔다. 얘기를 듣다가 어쩌다 생각나서 내가 말했다.

“아, 예전에 제 친구는 자기 미혼부가 로망이래요. 거기서 조정석이 미혼부로 나오나? 애기 혼자 키우는데 너무 멋있대요!”라고 하니 여자 차장이 “대리님은 몇 살이야?”라고 물었다. “아^^;(나이는 왜 묻지..) 저, 30대 초반이요.” “아, 무슨 10대나 20대 초반 같은 얘기를 하길래.” 하고 엉뚱하다는 듯이, “미혼부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여자가 애만 놓고 가는 건가.” 하며 웃었다. “아, 거기서 뭐 바람나서 도망갔다는데요, 잘 모르겠어요ㅎㅎ”

뒷자리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힘들겠다며, 의사여서 돈이 있어도 애 혼자 키우기 얼마나 힘들겠어, 하고 대화 꽃이 피었다.


요즘엔 점심시간에 일하는 습관이 생겼다. 가급적 정시 퇴근하려고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후딱 먹고 빨리 해야 하는 일은 해치우는 게 마음이 편하다. 월요일은 아침 7시 반쯤 출근해서 저녁 9시 반까지 일을 하다 왔는데, 덜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적은 것을 생각해보니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없었다. 나에게 업무 스트레스는 노동강도나 난이도, 앉아 있는 시간에서 오지 않고 관리 실패 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압박감과 나에게 지시하거나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의 언행의 부정적인 기운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라리 몸이 피곤한 것이 마음이 편하다.


오늘은 오랜만에 점심 먹고 산책 길에 나섰다. 비도 안 오고 공기도 상쾌했다. 구름이 풍성하고 하늘이 맑았다. 눈알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낮 최고 기온이 27도라고 뜨는데 선선해서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정말 아름다운 문장으로, 글만 읽어도 공감이 가게 선선한 날씨를 묘사하는 것이 늘 부럽다.


산책을 하고 돌아와 건물로 들어오는데 지사장님이 보여 손을 들어 ‘앗! 저예요!’ 하고 인사했다. 지사장님도 처음엔 당황하시다가 같이 손을 들며 인사했다. “지사장님~~~~ 아, 이제 국장님이시죠. 잘 지내세요? 적응은 좀 되셨어요?” 지사장에서 국장이 되어 내가 일하는 건물로 오셨다. “어이~ 잘 지냈어? 요즘 어때?” 늘 그렇듯 웃는 얼굴과 긍정적인 태도로 반갑게 맞아 주셨다. “힘들어요. 몸은 괜찮은데, 정신적으로 힘들어요.” 하니 “어효. 그럼 휴식이 답인데.” 하면서 시간 날 때 자기 방에 와서 차 한 잔 하라고 했다.


안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어른이라서 어제 짬이 잠깐 나서 국장실에 갈까 말까 하고 계단을 내려가다 아니지, 처음 오셔서 업무 적응하기 바쁘실 텐데, 하고 다시 돌아왔었다. “국장님 새로 오셔서 요즘 바쁘실까봐요. 진짜 아무 때나 가도 돼요?” 하니 “그럼! 일이 있어도 빼야지.” 하며, “올 때 내려가요~ 하고 전화만 한 통 하고 와.”라고 하셨다. 나는 내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생겼다는 데 위안이 되어 기분이 좋아졌다.


경영 관리 업무는 굉장히 광범위하다. 일반 사무직 업무의 범위는 만들어 내면  일이 업무가  정도로  갖다 붙일  있다.  부서 동료가 자기는 말이 그럴싸하게 자산 관리 담당자지, 쓰레기 처리반 같다고 힘들어 죽겠다고 해서 한바탕 웃은 기억이 생각난다. 관사 계약을 맡은 직원은 맨날 부동산 업자와 매물에 관해  소리로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가방을 메고 아파트 방을 보러 출장을 다닌다. 천만  이천만  깎아달라 협상을 하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너무 재밌다. 시험 봐서 사무직 지원할  이런    몰랐을  아니야.


공공기관 경영 관리 직원들은 경영 평가 지표를 하나씩 맡게 되어 관리를 해야 하니 부담이 크다. 정부에서 공공기관 경영실적을 매년 평가하는데, 경영관리와 주요 사업을 나누어 평가한다. 경영관리에도 정말 많은 세부 지표들이 있는데,  각 업무 담당자들이 세부 지표를 하나씩 맡아서 계획도 세우고 관리도, 이후 평가를 받기 위한 보고서도 직접 쓴다. 내가 계획을 잘 못하고 관리도 잘못해서 우리 기관이 점수가 깎일 수 있다. 소수점의 점수도 소중하다. 가령, 경영평가 점수가 B에서 C로 내려갈 수도 있다. 기관 이미지 하락도 그렇고 전 임직원이 이에 따라 받는 성과급도 한참 깎인다. 역적이 된다.


지표 관리 부담은 처음 겪어본다. 맡은 것이 아주 작은 점수이지만 맡자마자 안 하고 싶었다. 업무도 승진도 안 하고 싶고 그냥 이런 부담 없이 관리자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 시 돌아올 화살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오싹할 때가 있다. “그래. 괜찮아. 잘했어.”라는 뻔하지만 이 긍정적인 말이 제일 힘이 된다.


미혼모들은 얼마나 힘들까. 애기를 가졌을 때부터 느끼는 그 공포감과 부담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한 생명을 책임지는 데 의지할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몸 상태를 경험하며 출산까지 한 미혼모들은 정말 대단하다. 근데 미혼부가 꿈이라고 말하던 친구의 평소 캐릭터를 통해 보면 여자가 도망가 애기와 둘이 남겨져 사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난다. 너는 왠지 그런 꼴을 당할 줄 알았어. 애기가 철없는 아빠를 한심해하며 매일 잔소리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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