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네 Dec 05. 2021

헝그리 하트

아침에 일어나 정신이 깼지만 눈을 뜨지는 않은 채 다시 잠들려고 도톰한 이불을 더 끌어당겨 웅크렸다. 주말엔 알람 없이 더 잘 수 있는 게 특권인데 8시 몇 분에 깨다니 바이오리듬이 직장인이 되어버렸어. 왼쪽을 바라보고 누워 다시 잠결로 들어가려고 준비를 했지만 이미 정신이 깨어버려 쉽지 않다. 짓눌린 왼쪽 어깨가 아파 다시 자세를 정가운데로, 이어서 오른쪽을 향하여 고쳐 누우며 뒤척였다. 침대 발 밑에 둔 핸드폰을 집어 올려 시간을 본다. 핸드폰을 머리 근처에 두면 좋지 않을 것 같고 아주 멀리 두기엔 알람을 끄기 불편하니 발밑에 둔다.


양순이 인형 팔에 핸드폰을 눕혀 유튜브 영상을 틀었다. 딱히 구독하는 것도, 좋아하는 유튜버도 없지만 뭐라도 틀어놓고 싶었다. 심심하니까. 그렇다고 일어나서 활동을 할 의지는 없고 누워있는 게 좋으니까. 예전에 중국인 친구가 자기 고향의 귀한 차라면서 준 Liupao 찻잎을 스텐 필터에 우린다. 어젯밤에 머리를 안 감아서 잠결에 머리를 벅벅 긁었더니 머리가 부스스하다. 연하게 우렸더니 깔끔하고 가볍다.


밤 사이 크리스마스 관련한 텔레그램이 잔뜩 쌓여있다. 각자 집에서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 사진과 동영상이 공유되어 있고, 트리에 대한 러시아어 설명도 있다.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러시아 역사로 박사를 받고 지금은 미국에서 러시아학을 공부하고 있는 여자 러시아인의 유튜브 강의와 자료로 러시아어를 공부 중인데, 최근에는 크리스마스와 관련한 유료 강의를 결제해서 듣고 있다. 수업을 일방적으로 듣는다기 보다는 선생님이 올려준 pdf를 다운로드하여 자료를 보면서 공부하고 복습하고 작문을 위해 생각해가며 채워지는 게 크다. 같이 수강하는 30여 명의 외국인들과 텔레그램 단체방에서 공부한 내용을 활용하여 러시아어나 영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나처럼 다른 외국인들은 저마다 러시아어를 공부한 연차와 실력이 다른데 각자 이 수업을 들으며 공부한 노트를 찍어서 공유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지 보는 것도, 저마다 다른 글씨체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미국인도 있고 독일인도, 핀란드 사람도 있다. 선생님이 러시아어를 고쳐주기도 하고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풍성해진다.


새로운 단어를 배우는 게 재밌다

러시아는 서양과 달리 크리스마스 문화가 아니다. 크리스마스 연휴에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선물을 주고받는 그런 문화가 아니라, 새해를 맞이하며 즐기는 문화라고 한다.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한 행위를 새해를 즐기기 위한 행위로 보면 비슷할 것 같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나도 어릴 때부터 성탄절에는 교회를 가고 교회엔 트리에 온갖 방울과 지글지글한 장식, 번쩍이는 작은 전구들이 둘러져 있는 걸 봤지만 서양처럼 대대로 크리스마스 연휴를 즐기는 그런 문화권이 아니다 보니 그냥 별 감흥 없이 눈으로만 저런 장식을 보며, 아 그렇구나, 하는 정도였다. 유럽의 친구들은 크리스마스 주간에는 1-2주씩 쉬며 고향의 집으로 돌아가 온 가족이 함께 보내고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감과 흥분이 남달라 보여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텔레그램 단체방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사진과 어떻게 장식했는지 외국인들의 여러 설명이 가득한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정작, 나는 크리스마스나 새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별 감흥이 없다. 우리 집에는 크리스마스트리도 없고 장식도 없고 살 생각도 없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별다른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다. 그래도 따뜻해 보이는 조명과 쌀쌀한 공기와 대비되는 조화가 주는 추억 상기, 연말 특유의 분위기가 주는 불쑥 드는 감정은 좋아한다.

한남동

“나는 00이 여기 밖에서 다양한 걸 더 경험하면 좋겠어.” 나보다 13년 먼저 입사한 동료가 같이 밥을 먹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나는 나에게 애정을 가진 동료들이 반말을 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건 할 수 있는 것도 생각도 제약되고 틀에 갇혀있어 다양한 기회가 적다는 것. 최대한 이 조직 안에서 해보고 싶은 걸 해볼 기회는 주는 분위기이지만 아무래도 규정이랄지 예산이랄지 공조직 분위기랄지 제한되는 게 많은 건 사실이다. 또 한편으로는 딱히 도전하지 않고 주어진 일만 최소한으로 처리하면서 살아가도 월급이 주어지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헝그리 정신이랄까, 하는 게 점점 사라진다. 새로운 것, 재밌는 것을 해보고 싶고 도전하고 싶은 의욕보다 ‘굳이 안 해도 되는데 왜’가 점점 커진다. 기본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맡은 일과 주어진 시간의 양이 있어서 그렇기도 하다.


“나는 놀랬잖아. 00 씨가 학자금 대출을 직접 갚는다는 게. 너무 당연하게 다 집에서 내주고 편하게 컸을 거라고 생각했어. 기특하지 뭐야.” 20년 전에 입사한 옆 부서 동료가 밥을 사주며 말했다. 처음에는 이 분이 항상 날이 서있고 공격적이라 무서웠고 거리를 두고 지냈는데 어느 날 자리에 가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내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크게 웃으며 리액션을 해주고 공감해주고 궁금해서 질문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열렸고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그분은 원래 속에 화가 차 있고 분출을 잘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며, 나하고 밥을 먹고 싶다고 먼저 제안해 주었다. 내가 좋은 사람 같다고 순수해보여 좋다며.


나는 나와 다른 일을 하는 사람의 자리에 가서 구경하는 것을 재미있어하는데, 업무 중 짬이 날 때면 같은 층의 이 부서 저 부서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다. 사람마다 개성과 성격이 다 달라서 관찰하면 재밌다. 대상을 객관화하여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사랑스럽다. 한 명 한 명 역할을 하며 조직이 굴러가는 게 신기하다. 코로나 시대에 어쩌다 안전관리 부서에 가게 되어 코로나 현황에 빠삭해진 동료가 통화하며 설명하는 걸 보면 의료진인 줄 알았다. 처음 맡게 되는 일도 금방 내 것으로 만들어 척척 해 나가는 걸 보면 대단해 보인다. 승진을 할 때까지 이 자리에서 나가지 않겠다! 하는 사람들의 초조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행태 자체에 대해서는 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왜 저렇게 승진을 하고 싶어 할까? 개인의 안위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고 버티는 게 좋지 않아 보인다. 그 역할을 더 잘 수행할 사람으로 교체되는 게 조직과 동료들에게 더 나은 것이고, 또 그 업무를 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인사권은 경영진의 고유의 권리라 생각되어 효율적으로 최선의 인력으로 배치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한 명 한 명 원하는 요구를 들어주는 게 민주적이어 보이기는 하나 이기주의가 될 수 있고 누구의 말을 들어주는 게 다른 누구의 기회를 빼앗는 게 될 수도 있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렵다.


부장이 조용히 잠깐 자리로 오라고 부르더니 리투아니아 여행책을 손잡이가 있는 종이백에 담아 주었다. 자기가 잘 아는 교수가 리투아니아를 다녀와서 쓴 책을 받았는데 좋아서 한 권 더 사서 나를 준다고 했다. 저번에 내가 라트비아인 친구랑 친해서 리가와 탈린을 갔던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내가 좋아할 것 같다고 했다. 여행 에세이를 읽지는 않지만 공짜로 주니 둘러보며 영감을 받는다. 감성이나 생각이 담긴 글이라기보다는 교수답게 그 지역에 대해 공부하여 지역에 대한 역사, 문화, 여행지 정보 등을 담았다. 발트 3국은 물가도 싸고 아름다우니 이런 곳에서 살아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느릿느릿 피곤하면서도 품위있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