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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Nov 30. 2021

느릿느릿 피곤하면서도 품위있는

출근길 셔틀버스를 놓치고 마을버스를 타면 항상 지나가는 횡단보도. 한쪽에는 중학생 이상 학생들이 건너고 다른 한쪽에서부터는 유치원생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아이들이 서로 교차한다. 왼쪽에서는 대체로 까만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고, 오른쪽에서는 간간히 파스텔톤과 카카오 이모티콘이 그려진 가방, 외투, 우산이 몰려온다. 가방을 메고 우산을 탁-쓰고 야무지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


밤새 위장이 쓰려서 깼다가 빗소리를 들었는데, 따뜻한걸 배에 너무 대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는 아쉬움과 손발이 너무 건조해서 답답한 마음에도 비가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잠결에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위장약을 먹고 싶은데 아, 다 먹었지, 회사 서랍에 둔 걸 가자마자 먹자. 핫팩을 붙이고 가자, 하고 생각했다.


아침에는 주말에 새로 산 스커트를 입었다. 무릎 약간 아래로 내려오는 스커트인데 검은색 작은 무늬의 트위드 느낌의 머메이드 형태 스커트이다. 골반에 맞춰서 옷을 샀더니 허리가 커서 만 이천 원이나 주고 줄였다. 옷을 줄이러 갔는데 수선집 아줌마는 어떤 청바지를 한 뼘 밤이나 되는 길이를 가위로 싹둑 자르고 있었다. 와 저만큼을 다 잘라내? 하고 놀랐다. 다른 사람들은 매번 옷 살 때 수선을 해야 하니 불편할 것 같다. 옷은 사자마자 가져와서 입는 맛인데.


회사 화이트보드 달력을 지우는데 벌써 12월이 된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 줄에 빨간색으로 1/1이라고 쓰고 그 칸에 HAPPY NEW YEAR이라고 썼는데 전혀 실감이 안 난다. 서울에 있지 않아서 더 그런가 보다. 서울로 학교를 다니거나 출퇴근하면 연말 분위기가 느껴지는 화려한 조명과 장식이 있어 그나마 분위기를 느꼈는데, 나의 일상에는 그런 것이 없다.


길을 걷다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너무 읽고 싶어 진다. 새로운 장편소설은 언제 나오는 걸까. 이번에 노벨문학상 타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배가 만성적으로 계속 아픈데, 그래도 아주 약간 몸이 좋아지고 지난주까지 바쁘던 일이 지나니 정신적 여유가 생겨 책도 눈에 들어오고 러시아어 공부도 다시 하고 있다. 내가 자주 듣는 러시아인이 하는 유튜브에서 블랙 프라이데이로 온라인 교재를 할인해서 정말 싸게 샀다. 시험을 봐야 되는 게 아니니 재미있다. 의욕까지는 없지만 쉬는 시간을 잘 보내려는 생각은 생겼다. 스트레스가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프렌치 디스패치 같은, 공간도 예쁘고 재미있는 일을 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하니 우리 부장이 좋은 생각 같다며 자기 계발 특별 휴가를 주겠다고 했다. 구글 같은데 들어가면 좋겠다면서.


내 주위에는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학을 갔지만 예술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꽤 있다. 간간히 그들의 소식을 보며 응원을 하게 된다. 예술가의 삶이 한 편으로는 부럽고 한 편으로는 부럽지 않다. 나는 뭐든 귀찮아하고 게으르고 의욕이 없어서 따박따박 월급 나오는 게 차라리 맞을지 모른다. 업무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일도 재미와 보람이 있기는 하다.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스스로 재밌어서 한 일로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면 나도 좋다. 시켜서 한 것이라면 힘들 것 같은데 나에게는 크게 힘이 들지 않았고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전혀 아니었기에 사람들이 칭찬을 하면 나는 막상 무덤덤하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인데 내가 한 것이 칭찬을 받는 것이 의아하고 어색하다. 알고 보면 칭찬받고 인정받는 방법은 쉬운 데 있는 것 같다.


기한 내에 책임지고 해야 하는 일에 몰두 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안 든다. 일 외에 나의 삶이 없어진다. 다른 것에 신경 쓰거나 생각에 빠질 마음의 여유와 에너지가 남지 않게 된다. 정신이 멍하다. 상대적으로 조금 한가한 자리로 옮기고 싶은데 그게 될지 모르겠다. 내 자리에서 일해보고 싶어 하는, 나보다 에너지도 넘치고 역량도 충분한 다른 사람들도 많을 텐데 그들에게 기회도 줄 겸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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