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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Dec 19. 2021

도태되면 어때

인사 평가를 앞두고 부서장과 상담 시간을 가졌다. 10여분  간략하게 하려고 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1시간이 흘렀다. 우리 부장은 어려운 점이 뭐였는지 묻고 자기 경험에 비추어 어떠어떠하게 했더니 도움이 되더라, 하고 노하우도 알려주었다. 나의 인생 경로와 나의 생각을 흥미롭게 들어주었고 자기하고 비슷한 점도 있다며 공감해주었다.


부장은 나에게 어떤 커리어를 쌓고 싶냐고 물었다.

“저는 커리어도 성취하고 싶은 목표도 아무런 의욕도 없어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고, 대충 살고 싶어요. 사실 그래서 고민이 됐어요. 제 업무를 해보고 싶은 열정과 의욕 있는 친구들도 많은데 의욕 없는 제가 자리만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의 기회를 빼앗는 것 같아서요. 승진할 수 있는 기회도 골고루 줘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승진도 별로 안 하고 싶고 성장 욕구도 없는데 승진하려고 여기 있는다는 오해와 질투를 받고 싶지도 않아요.”라고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그건 위에서 판단할 문제야.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 오히려 집 가깝고 승진하고 싶다고 버티고 자리를 안 내주는 게 문제지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게 아니야.”라고 부장은 나의 말에 약간 당황하면서도 얘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오히려 놀 때도 시간, 분 단위로 쪼개서 놀고 24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산 사람이야. 근데 오히려 자기 계발이다 뭐다 악착같이 사는 게 오히려 근대적인 거란 말이지. 자본주의 산물인 것 같아. 성장과 자기 계발을 강요하는 사회는 오히려 경쟁력이 없는 것 같아.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시대에는 대리님처럼 삶에 여유를 가지고 쉬어가면서 영적인 성장을 하는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인 것 같아. 나 아는 선생님도 나한테 맨날 하는 말씀이야. 좀 쉬엄쉬엄해야 한다고. 맨날 잔소리 들어. 그 선생님 소개해주고 싶다. 대리님 만나면 엄청 칭찬할걸.”이라고 나의 생각이 가치 있다고 말해주었다.


“맞아요. 요즘 칼럼 보면 게으른 사람의 가치, 이런 글도 많이 나오잖아요. 전 자기 계발도 안 해요. 그 시간에 그냥 누워서 쉬고, 그러다 뭐라도 할 에너지가 생기면 하고 싶은 걸 해요.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생각을 하기도 하고. 전 성장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하고 싶은 걸 하다 보면 언젠가 성장해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성장하지 않고 도태되면 어때요. 도태되면 도태되는 거죠. 전 오히려 백수 시절이 좋았어요. 월 30만 원만 쓰고 살았는데도 마음 편했어요. 매일 독서하고 쉬고 늦잠도 자고. 조급함도 없었어요. 제 자신의 콘텐츠에 자신이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도태되면 어떤가, 그 삶을 자기가 선택한 건데. 대신 도태되었는데 자리는 유지하고 싶고 승진하기를 바라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와 정 반대의 열심히 사는 삶을 사는 부장에게 대충 살기의 가치를 설파하였다. 오히려 나는 열심히 살고 놀 때도 온 에너지를 쓰며 열심히 놀 체력이 안 되는 체질이라 애초에 포기한 삶일 수도 있다.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목표한 것을 이루어 낸 친구들이나 사람들은 대단해 보인다. 나는 그럴 의욕이 없기도 하고 체력도 안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부러운 적이 한 번도 없다.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그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고 대단하게 생각한다.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너는 공부도 잘하고 재능도 많은데 왜 아무것도 안 해? 더 좋은 회사에 갈 수 있는데 쫌만 준비해서 시험보지 왜 안 해? 로스쿨을 가거나 해도 될 텐데 네가 왜 그 회사를 다녀? 하고 악의 없는 의문을 가진다.


“전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좋아요. 백만 원만 벌더라도 그냥 맘 편한 게 좋아요.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취업 생각도 없었어요.”라고 하니 부장이 그러면 왜 우리 회사는 오게 되었냐고 물었다. “몇 년 전에 엄마가 암 말기셨는데, 제가 취업 생각도 없고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으니 도저히 안심이 안돼서 눈을 못 감겠다고 하셔서요. 제발 정규직에 취업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공기업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오게 되었어요. 근데 와 보니 꿀 직장인 거예요. 전 직장보다 업무 강도도 낮고, 내가 월급을 좀 반납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이 많고. 물론 사기업 다니다 온 동기들은 급여가 너무 적다고 하긴 하지만.”


부장님은 처음엔 우리 회사에서 경력을 쌓고 민간경력자로 정부에 들어간 선배들 사례를 얘기하며 나도 나중에 해보라고 말했다가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다른 데 가도 다 거기서 거기일 거 같고 큰 차이 없을 것 같다고 하자, “그럼 대리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 회사가 다닐만하면 60살까지 다니기도 괜찮을 거 같아.”라고 말하며, 언제 좋은 곳에 가서 더 얘기하자고 했다. 하루 종일 대화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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