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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Jun 26. 2022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남자처럼

부산 해운대

비가 올 거라던 부산은 덥다. 매주 장거리 출장을 가고 있는데 짐이 점점 가벼워진다. 처음엔 이것저것 넣어 어깨가 아팠는데, 이젠 최소한으로 짐을 싸는 노하우가 생겼다. 웬만하면 똑같은 옷을 또 입는다. 목욕가운이 있는 호텔이면 잠옷을 안 가져간다. 예전에는 화장을 위한 브러쉬도 휴지에 싸서 가져갔는데 오늘은 아이섀도우 한 개만 가져와서 손으로 쓱쓱 문질렀다. 보라색, 자주색, 회색이 그러데이션 되어있고 은은한 펄이 있는 맥에서 나온 한정판 아이섀도우인데, 오래된 것이지만 색깔이 신비롭고 예뻐서 계속 쓰고 있다.


기차에서 읽을 책도 무겁게 가지고 다니다 이제 아주 얇은 책 한 권만 가지고 왔다. 기차에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막상 타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게 가장 편한 일이지만 한 시간 이상 끼면 귀가 아프고 멍멍하다. 이어폰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크게 듣나 싶다. 시끄럽다. 어제 회의에서 발표자가 발표하는데 같은 테이블 여자가 계속 자리에서 통화하던 무례함이 떠오른다. 전화를 끊고 4번을 더 했다. 발표도 거의 안 듣던데 그럴 거면 나가지 방해되게 왜 앉아있나 싶었다.


몸이 안 좋으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민폐 끼치는 사람을 보면 날카로워진다. 요즘엔 서있기도 힘들고 어지럽고 기운이 없다. 뇌에 이상이 있나 싶기도 하다. 뇌출혈 같은 증상일까,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점심시간에 체육관에서 가끔 배드민턴을 치는데 최근에는 친지 1-2분도 안돼서 현기증이 느껴지고 쓰러질 것 같았다. 앉아있을 힘이 없는데 휴가 내기는 그래서 자리에 앉아 모니터만 멀뚱멀뚱 보며 최소한으로만 때우다 왔다. 위는 몇 주째 계속 아프고 속이 울렁거린다. 병원에 가니 롱 코비드라고만 하고 종합검사를 받아보라고 하는데 마음먹고 하기가 쉽지 않다. 동료에게 죽을 때가 된 것 같아요, 기운이 너무 없어요, 전 40을 못 넘길 것 같아요, 하고 흐느적거리면서 말하니 대리님은 결혼하지 마세요. 금방 죽을 거면 남자분은 무슨 낭패예요, 라는 답을 들었다.


나는 단조로운 걸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데 30년 동안 산 동네에서 계속 매일매일이 반복되니 이 도시에 흥미가 없고 따분하다. 퇴근 후에도 바로 집으로 와서 별 일 안 하고 누워있고, 그러다 보면 더 우울해지는 것 같다. 새로움이 필요하다. 이렇게 출장길에 오르면 다른 도시도 구경하고 일과 후에 새로운 장소에 가니 조금 낫다.

해운대 바다

회의는 해운대에서 있었다. 세미나실에서 바다 전경이 보여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5성급 호텔이라 차도 로너펠트 티백을 주네, 하고 카모마일 티백 하나를 집으니 직원이 직접 따라주겠다며 흰색 커피잔에 뜨거운 물을 담고 티백을 담근 후 건네주었다. 마카롱과 초콜릿도 접시에 담았다.


퇴근 후에 이런 풍경을 보며 일상을 보내면 어떨까? 6시가 다 되어가는 해변가는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 만큼 햇빛으로 쨍했다. 벌써 옷을 벗고 해변가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호텔에서 수영장 이용권 두장을 무료로 주겠다고 했는데 수영복을 가져오지 않아서 아쉬웠다. 대한민국 숙박 대전으로 7만 원 이상 예약 시 5만 원 할인을 하길래 오션뷰룸으로 예약했는데 아침에 눈을 뜨는데 바다가 보이니 새롭다. 황토색 모래 색깔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새로운 곳이어도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외딴곳으로 와서 일하는 것도 나중에는 우울증에 빠질 것 같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신한카드 앱에서 타로와 사주를 무료로 봐주는 탭을 발견했는데, 6월의 타로는 휴식을 권한다. 너무너무 지치고 어지럽고 기운이 없었기에 어머 타로가 맞잖아? 하고 와닿았다. 휴식을 가지고 자신을 다독이는 시간을 가지라는 말, 그렇다고 죽은 게 아니라 생명력 있는 나무에 매달린 것이고 거꾸로 매달려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좋았다.


요 몇 달 동안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책임감과 스트레스를 가졌다. 처음 해보는 일이 많아서 내가 해서 잘 못하고 망치면 어떡하지, 하는 부담이 컸다. 그러곤 서 있을 힘도 없을 정도로 건강도 급격히 안좋아지자 더더욱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쉬엄쉬엄해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것을 하고 싶고 좀이 쑤시는데 몸과 마음은 따라주지 않아 더욱 우울함을 느꼈다. 아마 호르몬의 영향으로 더 다운이 된 것 같다.


실제로 친척오빠가 없어서 어떤 게 친척오빠 같은지 알지는 못하지만, 친척오빠처럼 느껴지는 동료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우리는 서로를 메신저 베프라고 부른다. 메신저로 얘기하던 중 손이 다쳤다 하면 밴드도 가져다주고, 소세지가 먹고 싶다 하니 가져다주는 등 오프라인하고도 연결된, 메신저 상 베프만은 아니다. 내가 정신적으로 힘들어 보였는지 그는 잠깐 커피를 마시자고 불렀다.


“과장님은 이런 마음 들지 않으셨어요? 이럴 때 어떻게 해요? 특별히 취업을 위한 공부를 하고 싶지 않고 욕심이 없던 차에 마침 이 회사도 나를 뽑아주길래 선택한 길이고 후회도 없긴 한데, 내가 조금만 독기를 품고 노력해서 얻을 수 있었던 인생을 사는 사람을 보면 아쉽다거나. 음 그 일을 하는 사람을 봤는데 그 자리가 질투가 나고 하는 건 아니고,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너무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예요. 난 왜 저렇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노력할 의지와 욕심과 체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던 걸까. 재밌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워요. 그렇다고 내가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날 노력을 할 의지도 없고요. 그냥 너무 지쳐요.”


그는 내가 기운 없어 흐느적거릴 거라면서 의외로 멀쩡하다면서 자기가 더 피곤에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코로나 후유증인가, 우리 단체로 왜 이러지, 하고 말했다. 그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오히려 현타가 쎄게 올 때가 있다며 그냥 자연스럽게 지나가라고 말했다. 이 회사에서 충분히 하고 싶은 걸 하며 역량을 발휘할 수 있고 자긍심을 가지고 일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잠깐이라도 그와 얘기를 하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 하고 싶은 말을 털어놓으니 후련한 느낌도 들었고, 이런 얘기를 받아 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도 위안을 느꼈다. 엘리베이터에서 이 전에 같이 일했던 관리자를 만났다. 항상 웃는 얼굴로, 긍정적으로 사람을 대하는데나에게도 친밀하게 대한다. 어이, 잘 지내? 저번에 몸이 안 좋다며 괜찮아? 하고 쿨하게 물었다. 아니여.. 너무 안 좋은 것 같아요. 머리도 계속 아프고 배도 계속 아프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요. 더위를 먹은 건가,라고 징징거리면서도 애교있는 말투로 말했다. 그랬더니 그럴 땐 약이 있다며, 연애를 하라고 했다.

그래, 맛있는 밀면 먹으며 기분전환하자.
외국 감성도 느껴지는 해리단길
@원컵어데이

3년 만에 다시 온 해리단길. 망한 식당과 카페도 있고 새로 생긴 곳도 있었다. 친구와 갔던 아란치니 집은 다른 곳으로 이사했고, 다른 아란치니 집도 오늘은 문을 닫아서 파스타집을 찾아왔다. 주택을 개조한 집인데 분위기가 좋았다.


평일에 해운대를 걸으며 새로운 것을 보고 친구와 대화도 나누니 마음이 편해졌다. 휴식이 필요했다. 모래사장을 걸으며 신발을 벗고 발을 물에 담갔다. 낮엔 더워서 몸에 옷이 달라붙을 지경이었는데 밤에는 조금 선선해져서 좋았다. 그래도 여전히 옷에 땀이 나 찝찝한 기분은 있었지만. 모래에 발이 푹푹 잠기니 힘을 주고 걸어야 했다. 오늘 하루 만 보를 넘게 걸었다. 요즘엔 일상에서 만 보 걷기도 쉽지 않다.


낯선 곳에 오니 쉽게 잠이 들지 않는다. 12시가 넘도록 소리만 나는 티비 화면이 돌아가고, 오늘 찍은 바다 사진을 들여다본다. 내 침대에 있는 베개를 두 개 겹쳐서 베고, 옆 침대에 있는 베개를 하나 더 가져와 끌어안는다. 하얀 시트에 발을 구르니 마찰이 생기는 느낌이 재밌다. 하루 자기에 넓은 공간이 아깝다.


몰라. 여름 휴가로 일주일 휴가내고 괌에 갈 비행기도 예약했다. 오랜만의 비행기 예약이라 어색하고 떨렸지만 에라 모르겠다, 과감하게 눌렀다.

눈을 뜨자 보이는 해운대 바다뷰, 바닷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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