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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Dec 13. 2022

절정에 이르진 못했지만

가을 덕유산

신세계 강남점 발렛 파킹 대기 장소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다리가 아프고 숨이 막혀 진이 빠지는데 아무리 찾아도 앉을 곳이 없었는데 우연히 푹신한 소파가 있는 이곳을 발견했다. 창문 없이 환기가 안 되는, 사람은 미어터지는 백화점. 입을 때부터 후회할 줄 알았는데 결국엔 입고 나온 검은색 거위털 잠바는 이미 더워서 허리에 묶었다. 들고 다니려니 무겁고, 바지는 괜히 겨울용 두툼한 추리닝을 꺼내 입어서 걸을 때마다 발목을 잡는 마냥 숨이 턱턱 막힌다.


가만히 앉아서 이곳을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자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인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벌어서 저렇게 다니지, 하고 생각한다. 접어 올린 질 좋아 보이는 베이지색 코트 안쪽엔 디오르라는 작은 글씨들이 계속 겹쳐서 쓰여있고 걷어올린 안쪽 니트 무늬는 펜디이다. 그리고 신발은 신민아 가방이라고 봤더니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인데 250만 원이 넘고 간단한 신발도 그렇게 비쌌던 로저 비비에르인지 뭔지 하던 곳의 흰색에 가로로 긴 까만색 네모 보석 박힌 시그니처 운동화. 아빠가 안고 가는 아기는 핑크색 펜디 잠바를 입었고, 엄마는 발렌시아가로 도배된 니트 티셔스를 입었다. 저기 커다란 샤넬 쇼핑백을 든 여자는 옷도 샤넬 신발도 샤넬인데 자기 차 번호를 부르는 사람이 쇼핑백도 들어다 차까지 같이 가준다. 서비스가 좋다.


땀범벅이 된 나는 잠깐 한숨 돌리고 결국 또 복잡한 출구를 찾아 사람들을 뚫고 나가야 한다. 내가 큰돈을 벌지 못하니 돈 많은 남자를 만나든가 해야지. 생활비나 저축 걱정 없이 내가 번 돈은 내가 다 쓰기만 해도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단순히 비싼 명품이어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만든 좋은 소재의, 감각적인 옷과 신발을 갖고 싶다.


언젠가 엘리베이터에서 인사 부장하고 둘이 타게 되었다. 제일 높은 층까지 짧지만 길 수도 있는 그 시간에 어색하지 않게 말을 걸고 싶었는지 “월드컵 거리 응원가?” 하고 나에게 물었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반말을 쓰는 게 느껴졌는데 나도 친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니요.” 하다가 나에게 저렇게 물어보는 게 자기는 간다는 뜻인가? 하고 “가세요?” 하고 덧붙였다. 그랬더니 “아니, 난 이제 갈 나인 지났지.” 하길래, “아, 저도 갈 나이는 지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무슨!! 그런 소리 하지도 마.” 하면서 그 부장은 갑자기 텐션이 높아지더니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나무라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말투로 친근하게 말했다.


히든 안정환을 보는데 김성주가 축구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말을 연습하니 안정환이 정정하면서 국민 여러분이라고 해야지, 하고 말했다. 그렇지, 나처럼 비축구팬으로서 축구를 보는 국민도 챙겨야지, 하고 나는 혼자 말했다. 축구를 좋아하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나이지만 그 시간에 순간순간 선수들과 같이 호흡을 하는 것이 재미있고 벅차고 보람 있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왜 이 타이밍에 이런 생각이 드는가 싶지만 요즘엔 이타적인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흔히 우리 주변에 착해 보이는, 혹은 그런 이미지의 사람의 안을 들여다보면 사실 굉장히 이기적이고 실속을 차리고 계산적인 경우가 많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다가 아닌 것이다. 자기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은 애써 자신을 속이고, 주변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건 흘러나와 누군가에게는 들키고, 알고 보면 주변 모두에게 들켰는지 모른다.


폭우가 오는데 퇴근길에 깜빡하고 우산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오기 전에 자전거를 타고 가야지, 하는 마음을 수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솜사탕 핑크 색깔 잠바가 따뜻해서 날이 추운지 몰랐다. 모자도 달려 있으니 괜찮겠지, 하고 버스 대신 자전거 길로 걸었다. 집까지 오는 10분 동안 눈에 비가 계속 들어오고 손은 꽝꽝 얼어 감각이 없었다. 종아리까지 오는 가죽부츠에는 비바람에 낙엽 같은 게 붙어있고 모래가 자글자글하다. 청바지는 홀딱 젖어 물이 짜질 지경이다. 비 오는 줄 알면서 굳이 우산도 없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겠다고 결정한 나라니. 태어나서 세계일주인지 하는 프로그램에서 기안84가 페루에 가서 정말 무계획으로 대충 사는 여행을 하는데, 옷을 대충 빨아서 자기 방바닥도 아닌 호스텔 로비에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곳에 널어놓는다. 옷을 걸어 놓는 것도 아니고 신발 신고 다니는 땅에 너는 것도 이상한데 사람들 다니는 곳에 자기 팬티까지 널어놓는다. 그냥 옷걸이에 걸어 자기 방에 걸어도 되잖아. 되게 기이하고 왜 저래, 싶은데 나를 볼 때도 사람들이 가끔 그렇게 느낄까, 싶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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