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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Dec 26. 2022

참회였다

성탄절 밤은 그렇게 갔다. 실내에만 있다 보면, 특히 이불속에만 있다 보면 따뜻해서 오늘이 성탄절인지 겨울인지 별 감흥이 없다. 5주째 처방받아서 먹는 약에 신경안정제가 들어 있어서일까 점심 전에 한 시간, 특히 저녁 6시에서 8시에는 잠이 쏟아져 스르르 든다. 왜 우리나라만 유독 크리스마스엔 꼭 연인이 있어야 하고 연인과 함께 보내야 하는 문화로, 게다가 기독교인도 아니어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마음도 없는 사람들끼리 선물을 필수로 주고받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같이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남자동료가 다 상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남자동료는 러브 액추얼리 같은 드라마 영향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게나 말이야, 유럽에 있을 때 교환학생 친구들은 크리스마스 주간에 우리가 명절에 집에 가듯 다들 부모님 댁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보내던데, 하고 생각하며 했던 말이 떠오르는 밤이다.


결국 진도준은 죽은 것이 맞았고, 윤현운지하는 송중기의 세계관으로 이어졌다. 시간여행이라도 한 걸까, 하고 말하는 윤현우는 일주일간 17년의 진도준으로 살다 깨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에 말한다. 그것은 참회였다고. 비록 보는 이는 허무하고 황당하게 느낄 수 있지만, 드라마적이고 소설적인, 그리고 예술적인 말이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숨 막히는 인생을 일주일에 2-3번씩 쪼개서 보아 온다. 테이블에 모여 식사를 하고 논쟁을 하는 배우들을 보며 침대에 누워 연극을 보는 것 같다. 예술 속 인물들의 인생에 몰입해서 보면서 우리를, 또는 우리 주변 사람을 대입해서 본다. 그 맥락, 말, 분위기, 눈빛, 목소리를 통해 인생을 학습한다. 한동안 빠져나오기 힘들게 마음속 깊이 눌러 여운을 주는 작품이 있고, 돌아서자마자 잊어버리게 깔끔한, 깔끔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지만 다른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작품이 있다. 토마스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읽다가 덮은건 게이 소설이었다는 걸 알게되서는 아니다. 이년만에 넷플릭스를 구독하게 되었다. <화이트노이즈>를 보려고 구독했지만 하루만에 몰아본 <수리남>은 꽤 재미있었다. 얼른 노아바움백의 새 영화가 넷플릭스에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 전 자선단체의 후원자의 밤에 갔었다. 그 단체의 후원자는 아니지만 어찌어찌해서 초대장을 받고 가게 되었다. 하얏트 호텔의 로비 조명은 어둑어둑했고, 크리스마스 느낌을 주는 빨간색 이파리의 식물들과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후원자의 밤 행사를 좋은 데서 하네. 행사장 앞은 서빙하는 직원들이 쟁반에 받쳐 가져다주는 샴페인 잔을 들고 삼삼오오 얘기하는 여러 무리가 있었다. 나에게도 다가오길래 샴페인 대신 오렌지 주스를 집었다. 오늘의 드레스코드 색깔에 맞춰 차려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곳곳에는 연예인들도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는 재정 투명성에 대한 정보가 뜨지 않는 곳인데, 이사장이 전직 외교부 장관이고 이사에는 전직 대통령 아들도 있어서 인지 초대 손님에는 유명인사가 많았다. 전직 대통령 아드님이라는 분은 그 대통령과 정말 닮아서 놀랐다. 반기문 사무총장도 보였다. 와 여긴 무슨 기관이 반기문을 초대해서 축사를 해? 하고 놀랐다. 유명 아나운서의 정확하고도 신뢰감을 주는 말씨와 톤의 사회가 행사의 품격을 높였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청담동 메이크업이라도 받고 온듯한 사람들이 많았다. 저들은 내가 모르는 연예인일까?


원형 테이블이 빼곡한 행사장에 들어가 내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세팅이 되어있었고 와인도 한 병 있었다. 디너쇼의 식순과 메뉴가 쓰여있다. 메뉴를 보아하니 코스요리가 나오는데 안심 스테이크도 나온다. 레드 와인을 잠시 홀짝여보니 향이 좋다. 다니는 신경과에서는 절대 술과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입에 축이는 정도는 괜찮겠지. 입술이 버건디색으로 촉촉하게 물드는 기분이다. 프랑스 무슨 와인이라고 하는데 드라이한 맛과 너무 씁쓸하지는 않은 맛이 혀를 끌어당긴다. 여기는 어떤 사람들이 오나, 하고 둘러보았다. 이런데 올 줄 알았으면 옷을 잘 입고 오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사회자 소개로 끝날 때쯤 알고 보니 소녀시대 멤버였다. 소녀시대와 같은 또래의 사람으로서 소녀시대를 티비에서 자주 봤는데 어떻게 못 알아봤을까 스스로 신기하면서도 소녀시대라고 해서 다시 보는데도 그냥 얼굴이 굉장히 작은 예쁘장한 비연예인정도로 보여서 인지부조화라도 온듯 이상했다. 굉장히 고급스런 내추럴화장을 샵에 가서 하고 온, 그리고 일상적으로 피부관리를 받는, 부촌에 살면서 돈 걱정 없이 사는 여자처럼 보였다. 얼굴이 굉장히 작아서 오히려 얼굴을 보려면 눈이 좋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건너편에는 배우 이동건이 있었다. 멀리서 봐도 되게 잘생기고 멋있어서 계속 보게 되는 얼굴이었다. 존재감이 쎈 얼굴이 있고 그렇지 않은 얼굴이 있나보다.


나의 뜻과 일치하거나 그 뜻과 투명성이 공감이 가는 자선단체라면 한 곳을 꾸준히 후원하면서 이런 후원자의 밤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도 괜찮은 삶이겠다, 싶었다. 사회적 약자를 돕고 싶은 초심과 본연의 역할을 잃지 않고 계속되는 단체를 찾기가, 글쎄, 찾고 싶은 마음이 큰데 영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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