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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Feb 21. 2023

낯섦과 익숙함의 경계 속 설렘

새로운 도시에서 일하기

어둑해졌지만 완전히 깜깜하진 않은 여섯시 반 퇴근길. 아, 근무유형을 9:30 ~ 18:30으로 바꾸었다. 세련되게 구획되지 않은 수원의 구도심가 골목 언덕은 들쑥날쑥 제멋대로인 낡고 화려한 리스본의 언덕을 떠올리게 한다. 날이 풀리는 가 싶어 따뜻한 밍크 목도리를 서랍장에 넣어둔 걸 떠올리며 바람 부는 골목길에서 나는 목이 허전함을 느낀다. 영상일 듯 말 듯 영도 부근의 영하의 기온이다. 우리가 여름을 기다리며, 뭐 가을을 기다리며, 겨울을 기다리며, 이렇게 말하지 않잖아? 근데 유독 우리들은 봄을 기다린다는 말을 하는 게 신기해, 하고 새로운 부서장이 말한 것이 떠올랐다. 다시 추워져 검정 코트를 여미고 구도심의 냄새를 맡는다. 왠지 검정 코트를 입고 옅은 바람을 느끼며 걷던 리스본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수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인사발령이 난 것이다. 희망근무지는 아니었지만 한 시간 거리에 집에서 다닐 수 있는 데로 보내준 것에 감사하라는 말에 환승 1회에 도보 20분 코스에 선뜻 감사의 말은 안 나왔다. 매일 어떻게 다니지, 하고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막상 새로운 환경과 스트레스가 없는 업무 환경을 만나니 기분전환이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된다.


두 정거장 서서 갔을 뿐인데 두 달 전 퇴근길 마을버스에서 집에 오다가 미주신경실신 증상이 일어났다. 그래서 더욱 대중교통을 서서 타고 다니는 것이 두려운 상태다. 실신 직전 한참동안 과호흡이 생기고 삐- 하는 이명이 들리며 앞이 까만색과 하얀 점으로 가득해진다. 그러면서 순간 몸에 힘이 다 빠지면서 스르르 주저앉고 몇 초간 기억을 상실한다. 으으 이 느낌이 너무 싫고 공포스럽다. 신경과에 갔더니 미주신경실신이라고 해서 그런가보다 할 뿐 이렇다 할 예방법이 없고 바로 앉거나 눕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가끔 나는 실신을 하기 때문에 서서 대중교통을 타는 두려움이 크다. 그 증상은 너무 끔찍해서 마주하고 싶지가 않다.

퇴근길 나혼자. 서울의 지옥철과 달리^^

다행히 수원으로 향하는 길은 만원 지하철이 아니라 서울의 역방향이어서 지하철도 텅텅 비어 있고 지하철 역에서 갈아타는 버스도 앉아서 갈 수 있다. 그리고 십여분의 도보는 평지이고 산책하는 프레시한 느낌이 있어서 오 의외로 괜찮다! 생활 운동도 된다. 요즘 뱃살이 고민이던 차다. 새로운 근무지로 가는 마을버스는 1번이나 13-4나 20-2인가, 이렇게 타면 된다. 오고 가는 정류장이 약간씩 달라서 매번 다른 버스 정류장으로 다녀보면서 길을 익힌다. 어느 길로 가는 게 그나마 제일 편하고 빠를지, 나에게 편할지 이것저것 시도해 본다. 어떤 코스는 공원을 걷게 되어 있어 산책하는 느낌이 들어 좋다. 초행길엔 지도만 보며 걷느라 오래 걸렸는데 길에 익숙해지고 원래 걸음도 빨라서 도착 시간이 빨라진다. 도착 시간이 단축될 때마다 약간의 희열이 있다.


나는 내가 사는 도시에서의 삶이 너무 지루했다. 매일 똑같은 거리, 일상이 따분했다. 새로운 곳을 탐색하며 새로운 골목과 풍경을 만나니 리프레시가 된다. 새로운 일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가 제일 걱정이 되었는데 며칠 만에 금방 적응하니 일도 수월하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건물, 내 자리, 새로워진 점심 식당이 낯설어서 좋다. 완전히 낯설었던 것이 완전히 적응되어 지루해지기 전까지 아직은 많이 남아 있는 이 상태, 날이 길어지고 따뜻해지고 밝아질 때 퇴근하고 더 활동적이게 될 날이 기다려지는 설레는 이 상태가 좋다. 행궁동도 가보고 광교 카페거리도 가보고 책을 한 권들고 가서 읽다가 집에 가야지, 하는 미래의 기대감이 있어 즐겁다.


직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전에 근무하던 곳은 나에게 주어진 일을 빨리빨리 해서 칼퇴를 하면 일이 적은 거 아니야? 하고 자기 일을 더 떠넘기고 싶어 하며 눈치 주는 사람들이 있어 스트레스가 심했다. 부서를 떠나오면서 눈치준 사람에게 말했다. “제 업무 후임자가 얼마나 야근 많이 하는지 꼭 지켜보세요. 제 업무는 제 연차에 매일 매일 야근 할 일이었어요.” 하고. 내가 일을 잘해서 빨리 끝냈는데 야근하며 다른 사람 업무까지 더 도와줘야 한다면 누가 효율적이고 생산성 있게 일을 하겠는가. 이게 공공기관의 한계다. 지금은 야근을 안 해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는 환경이 위로가 된다.



살아있는 것, 살아있는 인간이 되는 것,
살아있는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진정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D.H. 로렌스 수필,
<생명의 불꽃, 사랑의 불꽃>


살아 있는 나, 지금 로렌스의 글을 읽고 있는 나, 살아서 수필을 쓰던 로렌스, 로렌스의 살아있는 문장. 다른 시대에 살며 글을 읽는 살아 있는 나. 문장이 살아 숨 쉬며 나에게 꽂힌다. 나를 변화시킨다. 나를 이룬다. 아껴서 읽고 있는 로렌스의 수필. 퇴근 후 밥을 먹고 침대에 반쯤 걸터앉아 만년필과 노트를 옆에 두고 로렌스를 읽는 요즘의 나의 삶이 편안하다.

@궁평항 야자수마을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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