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네 May 25. 2020

문학은 고상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요즘은 글 안 쓰세요?"


자리에 앉아있는데 예전에 신입직원 PT 때 면접관이었던 분이 지나가다 물으셨다. 내가 글쓰기와 예술을 좋아한다고 한 걸 아직도 기억하시는구나. "아 네.. 요즘엔 일상이 매일 똑같아서 영감 거리가 잘 없어서요."라고 사실과 다르게, 그냥 대강 대답했다. 길게 얘기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분을 붙잡고 나의 일상과 생각을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으니까. 사실 매일매일의 일상에는 다양한 상황과 영감 거리가 넘쳐난다. 엘리베이터에서, 복도에서, 구내식당에서 랜덤하게 마주치는 사람들, 그들의 복장 변화, 태도, 표정, 대화, 출퇴근 길 변화하는 자연 풍경, 가끔 창밖을 내다보면 보이는 구름의 색깔,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 등. 최근에 젊은 작가상 수상집을 읽고 나서 일상이 문학이 될 때의 가치를 다시금 느꼈다. 문학은 특별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다,라고.


다큐멘터리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중에서


그러나 요즘, 아니 나는 원래 글 쓰는 행위를 포함한 모든 것이 귀찮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고, 일 끝나고 집에 와서 엄마가 해놓은 따끈한 한 끼를 먹고, 그러고 나면 배불러서 졸리고. 처음에는 베개 두 개를 겹쳐 잠깐만 쉬어야지 하고 침대맡에 기대앉아 있다가 점점 몸이 내려가 눕게 된다. 게으르고 체력 약한 자들, 그리고 이들에게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을 때 코로나는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


지금도 베개 두 개를 겹쳐서 등을 기대고, 무릎에는 다른 베개 하나를 대고 그 위에 랩탑을 올려놓았다. 저녁용 세럼을 듬뿍 발랐더니 안경이 자꾸 흘러내린다. 사무용 모니터를 최대한 누렇게 해놓고 보는데도 눈이 너무 건조하고 아프다. 그러던 차에 엄마가 재난 소득 받은 건 이런데 써야 한다면서 동네 안경집에서 보안경을 하나 사주었다. 동네 상가에 있는 정말 정말 작은 안경집이어서 종류가 너무 없었다. 지하철역에 있는 큰 안경점에서 살 걸 하고 잠깐 아쉬워하기도 했다. 엄청 동그랗고 커서 거의 콧볼까지 올 것 같은 왕눈이 안경이랑, 거의 10 각형은 돼 보이는 금색 테, 그리고 반무테가 있었는데, 그나마 버건디색으로 된 반무테가 괜찮아 보였다. 대학교 4학년 때쯤인가 안경도 렌즈도 불편해서 라식수술을 했는데 이렇게 또 안경을 끼게 되다니 참 그렇다. 교정 후 시력이 1.5까지 나왔는데 이젠 1.0 이하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일하면서 눈이 찌릿찌릿 피로할 때 동료들에게 말했다. 아, 사무직 말고 다른 직업 알아봐야겠어요. 그럼 아줌마 과장님이 진지하게 그랬다. 그럼 빨리 알아봐, 이렇게 계속 시간만 가면 아무것도 못해,라고.


#오늘 멀리 복도에서 부장님이 나를 보고 목례가 아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다정함과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 부장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부장님의 자녀들은 아빠가 정말 자랑스러울 것 같아요. 대화해 본 높은 분 중에 유일하게 그분께만 그렇게 말했다. 그분이 대화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원래 똑똑함+ 그 자리에 오기까지 엄청나게 노력했음 + 맡고 있는 일에 대한 책임감+ 부서원들에 대한 애정+ 사안에 대한 미시적, 거시적인 판단력+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여 눈치 있고 여유 있게 행동+ 윗사람에게도 지혜롭게 쓴소리를 하는 모습이 선배로서 멋있어 보였다.


#비가 안 오다가 왜 퇴근하려고 나오면 비가 쏟아질까. 집까지 걸어가려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나왔는데 비가 쏟아져 내린다. 바닥에 고인 물에 빗방울이 끊임없이 명랑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바로 퍼져서 번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치는데 햇살은 평화롭게 반짝여서 이상하다. 탄천을 따라 집까지 걸어가는데 어느새 여름 풍경이 되어있다. 갈대가 있던 자리에는 갈대인지 다른 풀인지가 허리 높이까지 우거져있고, 멀리 보이는 산은 갖가지 초록색이 빼곡하다. 구름의 밑바닥은 회색빛으로 우중충한데 햇빛이 닿은 부분 부분은 하얗기도, 연한 형광 주황의 노을빛이기도 하여 넋을 놓고 보았다. 아주 멀리 우리 집 쪽은 구름 속에서 진한 형광 주황색 레이저가 강하게 내리꽂고 있다. 멀리서도 그 선이 다 보인다.

나에게 요즘 사랑에 빠진 그는 평소 색에 둔하다가 나를 좋아하면서 색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평생 몰랐는데 산 색깔이 저렇게 진한지 몰랐어, 초록색이 정~말 진해. 진짜 찐한 초록색이야, 내 마음 같아, 라면서. 나는 너 약속 안 하고 만나도 강남역 같은 한복판에서두 너 찾을 수 있어. 달이 너만 비춰줘서 빛나니까 찾기 쉬울 거같애, 라는 느끼한 말도 함께.


#마음이 많이 아픈 동료가 결국 퇴사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에게만 털어놓은 괴롭히던 사람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깊은 아픔, 커리어에 대한 고민 등이 계속 생각났다. 직장 내 동료이고 존댓말을 하는 사이이지만 오래 알던 친구 같았다.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도, 만나서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아도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다. 성장 배경이 비슷하고 서로 공감이 잘되었다. 눈만 보고 있어도 눈물이 날 때가 많았다. 내가 다른 지역으로 근무지를 옮길 때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보며 울었다. 서로의 인생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즐거울 때는 즐거워서, 우울할 땐 우울해하느라 챙기고 싶은 사람들이 자꾸 후순위로 밀린다. 그래도 어쩌다 생각나 연락을 하면 또 반갑게 이야기하니 그것대로 서로 위안을 받는다.


#새벽부터 비가 추적추적 왔다. 안내 문자에 따라 한 고등학교로 향했다. 건물 입구에서 줄을 서서 체온을 쟀다. 이른 시간이지만 수험생들로 북적북적했다. 나와 같이 시험 감독을 신청한 다른 층 부서 동료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시험 본부에 들어가서 벽에 붙은 내 이름을 찾아 동그라미를 하고, 나와 함께 들어가는 선생님은 어떤 분인지 확인했다. 처음이어서 민폐 끼치면 안 되는데, 정신 차리고 잘하자고 다짐했다. 동료들도, 시험장 교사분들도 속속 도착했다. 20-30대가 많이 지원한 우리 회사와 달리 학교 선생님들은 중년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많았다. 시험감독을 위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와 같은 고사실 감독 선생님은 경험이 많으시다고 했다.


매번 시험을 보기만 하는 입장이다가 감독관으로 들어가니 색다른 기분일 거라 생각해서 신청했다. 그런데 막상 고사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알바비 받는 만큼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과 앞으로도 두 시간 넘게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서있을 것을 생각하니 힘들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마스크를 유난히 눈 바로 밑까지 길게 끼신 단발머리의 여자 선생님은 핸드폰을 수거하고 인원 파악을 하셨다. 수험생들은 긴 안내방송을 지루해하며 듣고 있었고, 그동안 나는 칠판에 시험시간, 퇴실 가능시간을 써 내려갔다. 칠판은 어느새 큼직하고 동글동글한 나의 글씨체로 채워졌다.


시험이 2시간 반 정도 진행되어야 했지만 수험생들이 일찍 시험지를 내고 돌아가 예상시간보다 30~40분 일찍 끝나 점심을 먹었다. 동기 한 명이 같이 들어간 선생님에게 순대국밥집을 추천받았다며 가자고 했다. 굉장히 언덕이 진 곳을 따라 20분 정도 걸었다. 예기치 않게 시골 풍경 같은 곳이 펼쳐져서 우리는 푸르른 여름에 배낭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숨차하며 순대국밥집에 들어갔지만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오후에도 시험은 계속 진행되었다. 오전에 한 번 해봐서 그런지 조금 익숙해졌지만 지루한 건 더 심해졌다. 가만히 오랫동안 이 생각 저 생각, 미지의 세계까지 다녀왔는데도 8분밖에 지나지 않아 있었다. 오늘 회사에서는 또 주말 시험 감독 지원자를 받았지만 나는 다시는 안 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엑스를 눌러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밖에 비가 오는 것 같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