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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Jul 02. 2023

인생 여행 속 작은 보상

이탈리아에서 만들었다는 1리터짜리 오트밀크를 냉장고에서 꺼낸다. 은색 냉장고의 앞부분을 터치하면 음료 칸만 열린다. 냉장고의 왼쪽 문을 열어 냉동실에 얼린 바나나 세 조각을 꺼내 믹서기에 넣고, 이번엔 냉장고 오른쪽인 냉장실을 열어 블루베리 한 팩을 꺼내 일부를 덜어내 씻는다. 30초 이상 씻는 게 좋겠지? 블루베리와 오트밀크가 반정도 담긴 머그컵을 믹서기에 털어 넣는다. 무른 과일로 설정하고 재생을 누른다. 내 손은 바로 귀로 옮겨가서 세게 막는다. 믹서기가 엄청나게 시끄럽기 때문이다.


고소하고 달달하게 아침을 보내고 누워서 티비로 유튜브를 이리저리 본다. 다음 주에 방콕 여행을 가서 자주 찾아봤더니 방콕에 관한 것이 연관해서 계속 뜬다. 짜뚜짝 시장, mbk 몰 등등. 방콕은 쇼핑의 천국 같다. 싸고 예쁜 게 많아 보인다. 저번에 라오스에 갔었을 때 국경을 넘어 태국 우돈타니에 가서 산 와코루 노 와이어 검정 브라는 너무 편하고 좋아서 거의 2년간 매일 입다 운명을 다했다. 이번에도 와코루 브라를 비롯하여 사고 싶은 걸 메모장에 한가득 써 놓았다. 필라테스용 반바지 레깅스, 감각적인 디자인의 코끼리 바지, 왕실 느낌의 고급스런 티팟세트, 크록스 지비추, 예쁜 원피스, 사무실 슬리퍼 등등


12시에는 미용실 예약을 해 두었다. 어제 자기 전에 갑자기 파마가 하고 싶어 네이버예약을 했다. 내가 소개한 곳에서 동료가 파마를 했는데 예쁘게 잘되어서 영감을 받기도 했고, 나도 평소에는 에어랩만 하다가 아침에 늦잠을 자느라 에어랩 할 시간이 없어서 파마를 하면 좋겠다 싶었다. 머리가 어느 정도 길어서 가슴까지 오니 인스타그램에서 검색한 빌드펌 같은 걸 해보고 싶어서 캡처해 갔다. 내 머리는 곱슬머리이고 얇아서 이 머리로 나오진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보겠다 한다. 빨간색 머리의 디자이너는 허쉬컷을 해서 허쉬펌을 하겠다고 말한다.


이 미용실은 10만 원 초반으로 영양에 프리미엄 펌을 해도 가격이 저렴한 대신 예약을 해도 많이 기다린다. 내 머리를 하면서 연달아 손님을 받아 여러명을 동시에 봐주느라 손님이 방치되는 시간이 길다.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머리에 메두사처럼 꽂고 있는 시간이 10분이면 된다더니 30분 넘게 앉아있도록 사람이 안 온다. 한 자세로 불편한 의자에 계속 앉아있으니 엉덩이가 너무너무 아파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지나가는 다른 미용사를 불러 이것 좀 빼줄 수 없냐고 말했다.


약 네 시간 반동안 앉아서 시간을 보내니 비행기를 탄 것 같다. 흘러나오는 케이팝에 노출되니 모르는 노래도 알 것 같다. 엄정화의 페스티벌이 나온다. 엄정화는 노래를 정말 잘하는 것 같다. 소녀시대 노래가 나온다. 나는 소녀시대와 같은 또래다. 대학교 1학년 때 투피엠이 축제에 와서 본 이후에 보이그룹 멤버 전원의 얼굴과 이름을 아는 그룹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동료들이 빵 터졌다. 지나가는 40대 후반 부장님도 나도 그 정도는 아니라며 놀렸다.


지난주에는 승진을 했다고 축하를 많이 받았다. 평소에 친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문자와 메일로, 사내 메신저로 축하를 전했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오면 검색해서 누군지 확인하고 나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특히 이사님은 장문의 문자를 보내주면서 오히려 늦은 보상이라고 생각하라고 너무 수고 많았다고 자기도 00 과장의 승진이 너무너무 기쁘다며 감동을 주셨다. 간부가 아닌 직원들은 평소에 이사하고는 대화도 나누기 힘든데 장문의 문자를 받다니 기분 좋기도 했지만 평소 인품이 훌륭하다고 느끼는 분에게 인정과 축하를 받으니 더 좋았다. 감사한 몇몇 분들에게 감사를 전하면서 오랜만에 기관장실에도 가서 인사를 나누었다. 기관장은 나에게 작년에 보고서도 정말 잘 써줘서 좋은 점수를 받았고 정말 고맙고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부장에게 특별히 고마워하라고 자기 방에 들어올 때마다 내 칭찬을 계속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건 당연히 부장님이 부려먹은 보상을 주시려 한 거예요.”라고 말했더니, 같이 배석한 비서실장도 기관장도 빵 터져 웃으면서 역시 000 대리는 못 말린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상대를 당황스럽게 하면서도 재미있게 할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저번에 같이 일하던 부장에게 승진했어요~라고 먼저 전화를 걸며, 같이 일한 적 없는 사람들도 이렇게 축하 문자를 보내는데 왜 축하도 안 해주시냐고 말한다. 그러면 당황하면서 자기 출장이라 못 봤다고 자기 그런 사람 아니라고 막 변명을 한다. 그러면 나는 같이 일한 사람끼리 너무 관심이 없으신 거 아니에요? 하면서 면박을 준다. 내가 통화하는 걸 들은 주변 동료들은 이런 사람 처음 본다며 웃는다. 난 사실 이 부장님이,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은 더 높은 사람이 되셨구나, 축하를 빼놓지 않을 사람인 걸 알기에 전화를 걸었다. 작년에 코로나에 걸렸을 때도 제일 먼저 걱정의 문자를 보내준 분이다. 근데 내가 핸드폰 번호를 저장을 안 해놔서 오히려 답장을 못했다.


평소에 별로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동료인데 챙겨주며 축하를 해주니 인간관계를 다시 보게 되면서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전 직장에서도 승진 전 달에 그만두어 내 인생에 승진은 처음이다. 그것도 인사적체가 심한데 앞 사번도 한참 제치고 동기들 중에서도 제일 먼저 했다. 조직의 인정이 기쁘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다. 인정을 위해 일하진 않지만 내가 남다르게 한 것을 인정해 주면 기분이 좋고 뿌듯하다. 셔틀버스에서 내가 일했던 부서에서 내 일을 이어받아하고 있는 동료를 만났는데 대뜸 왜 다른 회사를 가지 않고 여기를 들어왔냐고 물었다. 오히려 효율성과 성과를 인정해 주는 사기업이나 더 인지도가 높고 들어가기 힘든 공사를 가지 않았냐고. 내가 해 놓은 문서와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일을 하나 싶었다고 한다. 처음에 업무인계서 보고 어떻게 이 일을 다 했나 싶어 충격받았다고. 그러면서 내가 체계를 잘 잡아 놓은 덕분에 일을 쉽게 하고 있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남다르게 적극적으로 한 일을 별거 아닌 듯이 그거 그냥 누구나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하는 식으로 평가 절하하는 사람도 있고, 즉시 돈으로 보상받지도 연공서열을 뛰어넘지 못하는 조직이지만(공공기관은 그닥 열심히 안해도가만히 있으면 시간 지나면 진급을 한다) 그래도 누군가 이렇게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니 행복했다.


손을 뻗어 여성동아를 집어 첫 페이지부터 넘기기 시작한다. 미용실에만 오면 잡지를 볼 수 있다. 23년도 트렌드는 뭔가, 하고 가볍게 넘겨 보면서 아, 나도 20대에는 40대쯤에 성공한 커리어우먼이 되어 여성중앙이나 여성동아 같은 데서 인터뷰를 하고 표지모델도 하고 싶다는 꿈을 꾸었지. 아직 40대는 남았으니 가능도 할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 코웃음 치며 얼른 머리를 끝내고 스타벅스에 들려 새로 나온 피스타치오 아보카도가 든 음료를 포장해 가야지, 하고 생각한다. 승진 선물로 받은 기프티콘을 써야지. 새로 나온 그 아보카도 음료는 맛있긴 한데 너무 달아서 이번엔 모카시럽을 뺄 거다.


미용실에 가져간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이 4분의 1 정도 남았다. 여행을 떠나는 폴란드 여자가 비행기를 타고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진다. 대학교 근처의 베이지색과 잿빛 섞인 건물을 떠올리기도 하고 대화, 냄새의 파편, 흑백 카메라로 촬영된 것 같은 일상적 장면들, 의미를 상실한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녀의 여행과 플래시백을 따라가다 보면 아날로그적인 옛날의 순간들이 떠올라 겹쳐진다. 방송부 시절 마이크를 켜고 점심시간에 내 핸드폰에 저장된 mp3곡들을 재생해 식당에 틀었다. 조약돌처럼 생긴 은색 삼성폴더폰이다. 음악 재생기능은 없고 그냥 음악을 스피커로 흘려 놓아 음질이 좋진 않다. 장나라의 겨울일기라는 곡으로 시작했다. 고1때 짝꿍은 유명한 피디가 되어 유퀴즈에 나왔다. 유퀴즈를 평소에 안보는데 우연히 그가 인스타그램에 뜨는게 반가워서 연락을 했다. 자, 이번주 부터는 윤석열이 선사한 두살 어려지는 시간이다. 다음 주에는 비행기를 다섯 시간 반정도 타야 하는데 좁은 곳에서 지루하지 않게 갈 수 있을까? 여름 휴가라고 떠나면서 너무 더운 곳으로 가나 싶지만 다행히 수원하고 기온이 그리 차이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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