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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Jul 10. 2023

살아 있는 인간이 되는 것

을지로에서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부터 배가 살살 아픈 것이 생리통이 맞았다. 방콕 가기 전에 생리해서 좋다, 하면서도 배가 아픈 건 짜증 난다. 그러던 중 누워서 핸드폰을 보는데 우리 부서장의 부친상 문자가 뜬다. 미끄러져서 입원하셨다고 하긴 했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으시다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하고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집 근처 장례식장이어서 점심때쯤 들렀는데 부장은 오히려 초연한 표정이다. 와줘서 고마워하는 눈인사와 유머러스함을 잊지 않는다. 너네들은 낙상하지 마라, 하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맑은 황금빛으로 대기가 가득한, 너무나 기쁜 아침이었다.
인간의 마음에는 이 얼마나 귀중한 순간이란 말인가!

내가 이 생동하는 말없는 세상,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공간만이 기쁘게 비상하는 이 세상을 목적없이 배회하게 해주시길.

-D.H.로렌스, <바다와 사르디니아>


누군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굉장히 얇다는 걸 생각하게 된다. 눈을 떠서 아침을 맞이하면 아침잠이 덜 깨 헤롱헤롱하며 겨우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회사까지 가고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산다. 그런데 살아있는 걸 각성하게 되면 ‘와, 오늘 내가 살아있네, 자고 일어나니 하루가 또 생겼네!’ 하고 새삼스럽고 신기해진다.

E중에 가장 I라는 나는 귀차니즘이 강해 집에 누워있는 걸 좋아한다. 새로움을 추구하고 영감 받는 걸 좋아하는데 또 멀리 나가는 건 귀찮다. 이동시 지옥철을 숨 막혀해서이기도 하다. 그래도 해외여행은 좋아한다. 새로운 풍경을 보고 새로운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게 재밌다. 이번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새로운 일상 이야기를 듣고 에너지를 받았다. 그래 난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하고 영감과 의욕을 얻는 사람이었지. 그래 난 E 긴 E였어.


10년 전에 같이 고시 경제학 수업에서 만난 스터디 모임이다. 나보다는 다 언니 오빠들이다. 공무원이거나 로스쿨을 다녀 곧 변시를 앞두고 있다. 직장인이 되니 대화를 나누면 나도 공감 가는 얘기가 많다. 어느 조직이든 HQ에 있으려면, 그리고 주류로서 승진도 원하는 때에 하고 인정 받으려면 페이퍼가 안되면 안된다는 것. 나는 기획력과 문제해결력 없는 사람을 보면 무시하는 마음이 든다. 생각하는 능력에서 자신감이 나온다. 생각 못하면 멍청이이다. “그래도 우리 다 밥벌이하면서 뭐라도 하고 있네. 10년 전에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을지 진짜 몰랐어.” 하고 언니1이 말했다. “그러게, 오늘 이렇게 승진 축하, 결혼 축하를 하고 있다니. 우리가 알고 지낸 지 벌써 10년이라니!” 하고 오빠1이 말했다.


신림동 북카페에서 이삼일에 한 번씩 만나 공부한 걸 점검하고 얘기를 나누고 스트레스를 풀었다. 북션이라는 서점 겸 북카페였는데, 자주 먹던 음료도 있었는데 아직도 있으려나. 생각해 보니 자취도 하고 학교도 직장도 다니느라 20대 나의 매일의 일상은 서울이다. 서울 사람은 아니지만 I am from Seoul이라고 대답하기에 어색함이 없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서울에 나와 을지로를 걷고 명동을 걸으니 와, 여기는 매일 내가 버스 타던 곳인데, 하면서 익숙하던 곳을 오랜만에 봐서 신기하고 좋다. 여기 버스정류장에서 정말 우연히 만난 사람이 많은데. 우연히 만나서 놀란 적이 많다. 같은 고등학교에 대학교였던 예쁜 애. 나에게 결하라는 여자를 닮았다고 말한 어떤 오빠. 연극배우였는데 지금은 뭐를 할까?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하루하루를 사느라 옛날 사람들이 기억이 잘 안 난다. 바닥에 써있는 서울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다가오면서 더 이상 나의 일상이던 장소가 아니다.

백악관으로 출장 갔던 언니1의 출장기를 들으며, 문득외국에서 일상을 보내며 저녁에 이렇게 와인바 같은 데서 외국인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를 다시 빨리 잘하고 싶다. 내년에 대학원 수업을 들으려면 이제 영어로 에세이를 쓰는 연습을 해야겠다. 사실 말로만 이렇게 하면서 마음만 먹고 늘 꼭 필요할 때 닥쳐서 할 거란 걸 안다. 성공하는 사람과 나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4월에도 영어시험을 보겠다고 책을 사놓고 어느 정도 감이 잡히니 책도 다 풀어보지 못하고 대충 뭉개다가 시험을 봤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 나의 단점이다.


아직 로스쿨을 다니느라 학생인 오빠2가 로클럭 시험을 볼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변호사 시험도 얼마 안 남아서 고민이라고 했다. 똑똑하고 실력 있는 사람이라 변시는 한 번에 붙을 거라고 믿는다. 나도 법을 공부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나는 판사보단 검사를 하고 싶다. 조지고 추궁하고 이런 게 흥미롭다. 공부할 때 잠깐 헌법을 맛봤는데 수험용으로 성적은 잘 나오는데 법은 용어가 딱딱하고 재미가 없다. 논리적인 것을 좋아하고 허점을 파헤치는 걸 좋아하는데 막상 법을 업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그닥 자신도 없고.


매일 출근길에 건너편에서 걸어오던 핫팬츠 여성이 처음으로 긴바지를 입은 걸 보고 희열을 느낀다. 바람이 불면 휘날리는 베이지색 바지다. 매번 볼 때마다 직장 가는 복장 같은데 핫팬츠를 입다니, 하고 뜨악했다. 굴곡 없는 일자 몸매에 핫팬츠를 입고 싸구려 베이지색 구두를 신었다. 걸을 때마다 셀룰라이트가 울퉁불퉁 흔들린다. 왁스로 매만진듯한 숏커트 머리에 하늘색 섀도를 하고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짓는데 눈살이 찌푸려진다. 매일 8:45에 지하철 칸에서 알람을 맞춰 놓고 울려대는 남자와 이 여자 중 나에게 더 비호감은 누구일까, 하고 쓸데없이 깊은 고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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