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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야 Jul 16. 2024

 너도 나도 처음이었으니까.

두 달여의 기간제를 무사히 견디고 드디어 발령이 났다. 정식 발령 전에 만난 동료 교사로 인해 상처를 받았지만 발령을 받아 우리반 아이들이 생긴다는 사실이 조금은 설레였다. 작은 벚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리 듯, 마음 속에서도 작은 기쁨과 기대감이 흩어져 떠다녔다. 처음은 언제나 특별하고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다. 첫 발령된 학교에서 처음 5학년 담임이 되어 만난 아이들도 그래서 더 특별하고 기억에 많이 남는다.     

 

2000년대 첫 발령지는 재건축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었다. 막 입주가 시작된 곳이어서 처음 13명으로 시작한 우리 반은 끝날 때는 27명이 될 정도로 끊임없이 아이들이 전학왔다. 그래서 그런지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담임인 나도 신규이다 보니 교실은 언제나 혼란스러운 에너지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당시 교장선생님께서 담임 소개를 해 주실 때 “올해 신규 발령으로 오신 오후야 선생님이십니다.”라고 굳이 ‘신규 발령’이라고 콕 찍어서 친절히 말씀해 주셔서 아이들은 모두 내가 신규 교사임을 알고 있었다. 가끔 내가 실수를 할 경우 아이들은 귀엽게도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처음이시잖아. 이해해 드리자.”

또 친구들이 떠들 때면 이렇게 말했다.

“야, 선생님 처음이시잖아. 너희들이 그러면 선생님이 힘드셔.”

놀랍게도 나는 아이들에게 배려를 잔뜩 받았다.    

 

처음이기에 교실 현장을 잘 모르던 나는 무조건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육아든 교육이든 친구 같은 부모나 교사보다는 권위적이지는 않지만 권위있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저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의욕만 앞섰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수업 시간은 내 의도와는 다르게 시끄럽거나 어수선한 것 같았고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날 좋아한다고 느꼈고, 다들 즐겁게 조잘거리며 행복해하는 표정으로 학교 다니고 있으니 이정도면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그리고 나는 다음 연도에는 좀 더 전문적이고 아이들도 잘 지도하는 교사가 되고자 아이들에게 올해 우리 반에 좋았던 점, 개선해야 할 점 등을 적으라고 하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정말 즐거운 한 해였어요!' 같은 칭찬만을 기대했었나 보다. 생각지도 않게 몇몇 아이들이 시끄러워서 수업 시간 집중을 할 수 없었다는 내용을 보는 순간 당황을 금치 못했다. 행복해하며 그렇게 같이 떠들더니 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집중해서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내가 그 마음도 모르고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웃으며 넘어가다니 내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그래서 다음 연도에 나는 큰마음 먹고 첫해의 나와 다른 카리스마가 있는 선생님이 되었다. 허용되는 범위를 분명히 알려주고, 잘못된 행동은 엄격하게 지도했다. 일관성 있는 지도안에서 아이들은 집중도 잘하고 안정감을 보였다. 물론 지금의 나는 두 번째 해의 카리스마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카리스마도 체력이 좋은 젊을 때나 가능하다.    

 

발령 첫 해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어느 날이었다. 다녀온 뒤에는 수학여행비를 정산하게 되는데 잔액이 조금 남았었다. 금액이 큰 경우는 학생들에게 환불이 되고 금액이 적을 경우는 기부하게 되었는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남은 금액이 학생 당 15원 정도였다. 그래서 남은 금액은 기부하기로 결정되었다. 반 아이들에게 이 사항과 관련한 가정통신문을 나눠주며 설명해 주고 있는데 한 녀석이 아주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러는 것이다.

"선생님. 저는 기부하고 싶지 않은데요? 왜 학교 마음대로 기부해요?"

순간 너무 화가 났다. '아니 고작 15원도 기부하지 못할 정도로 네 마음의 그릇이 그 정도인 거야? 응?' 젊고 미숙했던 나는 썩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주머니에서 20원을 던져주며 "야! 가지고 가!" 라고 외쳤다. 지금이었다면 조용히 불러서 다시 한번 취지를 설명해 주고 다독였을 텐데 그 당시 나는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모습에 너무 화가 나 12살의 아이처럼 똑같이 굴고 있었던 것이다. 늘상 시니컬한 그 아이의 모습에 평소에도 상처를 많이 받았었기에 더욱 감정의 동요를 감출 수 가 없었다.   

   

2년이 지난 스승의 날. 중학생이 된 그 아이와 다른 아이 두 명이 날 찾아왔다. 너무 반가워 피자집에서 피자를 먹고 있는데 그 아이가 그때 그 에피소드를 꺼내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그때는 왜 그랬나 몰라요. 정말 사춘기였나 봐요.”

나는 깜짝 놀라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너 기억하니? 하하하!”

옆에 있는 친구는 거들며 내가 동전을 던져주던 모습을 장난스럽게 재현하며 말했다.

“선생님, 그때 표정이 진짜 먹고 떨어지라는 표정이었어요! 하하하.”

“풉. 선생님도 미안했어. 내가 너무 했지?”

“선생님도 그런 상황이 처음이었으니까... 이해해요. 하하하.”

피자집 안은 우리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고, 그렇게 수학여행 동전 사건은 우리의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정적으로 큰 싸움 하나 없이 학급을 잘 운영했다고 생각했던 두 번재 해의 아이들은 졸업 후에 연락이 없었다. 반면 엉망진창이고 실수가 많았던 첫 해의 제자들과는 아직도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다. 아마도 나의 그 의욕만 앞서던 어리버리함을 그들은 인간적이며 친근하게 느낀 게 아닌지.  

     

처음은 항상 실수투성이이다. 신입 교사일 때 감정 조절이 그렇게 어려웠다.(물론 지금도 어렵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마음도 너그러워지고, 가르치는 기술과 상담 기법도 늘어간다. 그러니 아직 걸음마 단계인 신입 교사에게는 누구든 좀 더 너그러운 눈길로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 교사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신입 직원들에게 우리 반 제자들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너그럽게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단지 일만 하는 ‘직장인’이 아닌 자신의 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정체성을 가진 ‘직업인’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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